[책마을] '파괴적 혁신'의 주체는 新기술이 아닌 소비자

입력 2019-09-26 17:39   수정 2019-09-27 00:52


“우리가 특별히 잘못한 건 없었다. 그런데 어쩌다 보니 무너지고 말았다.”

마이크로소프트 출신이며 노키아 최고경영자(CEO)를 지낸 스티븐 엘롭의 말이다. ‘미국의 국민 의류’라고 불린 제이크루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미키 드렉슬러는 “디지털 변화 속도에 어떻게 대처할지 몰랐다”며 “10년 전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좀 더 일찍 대응할 수 있을 것”이라고 토로했다.

노키아, 제이크루 등 한때 시장을 지배한 기업들이 속절없이 무너졌다. 위기를 감지했고 신기술에도 투자했지만 소용없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디커플링>은 시장의 파괴를 자행하는 주체는 신기술이 아니라 ‘순진한 고객’이라고 단언한다. 책을 쓴 디지털 마케팅 전략, 전자상거래 분야의 전문가인 탈레스 S 테이셰이라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노키아와 제이크루의 ‘처방’이 잘못됐다”며 “원인을 기술 혁신에서 찾으려 한 빗나간 진단이 잘못된 처방을 이끌었다”고 지적한다.

저자는 8년간 20여 개 산업과 수백 개 기업 사례를 연구 조사했다. 그 결과 성공한 신생 기업들의 공격 패턴을 발견했다. 그것이 바로 책 제목인 ‘디커플링(decoupling)’이다. 통상 디커플링은 보편적인 세계 경제의 흐름과는 달리 움직이는 탈동조화 현상을 이른다. 이 책에서는 ‘분리하고 해체한다’는 뜻으로 이 용어를 쓴다. 기존 기업이 제공하는 검색과 평가, 선택과 구매라는 ‘고객 가치 사슬(CVC·customer value chain)’을 끊고 일부만 떼내는 것을 의미한다.

아마존은 TV를 사려는 소비자의 ‘구입’ 단계에만 집중했다. 온라인에서 제품 정보를 얻은 소비자들이 베스트바이, 월마트, 토이저러스 같은 오프라인 매장에서 실물을 살펴보고 구입은 다시 아마존 사이트에서 하도록 이끌었다.

우버는 차를 고르고, 구입하고, 유지하고, 폐기하는 과정을 없애 버렸다. 남겨 놓은 것은 단 하나 ‘사용’ 단계다. 넷플릭스는 소비자가 인터넷에 연결하고 접속하는 것에는 개입하지 않은 채 ‘영상 시청하기’만 공략했다. 동영상 스트리밍 서비스를 하는 트위치도 ‘게임 플레이 구경하기’만 제공했다. 저자는 고객의 불편한 활동을 집중 공략해 분리해낸 작업을 통틀어 ‘디커플링’이라 부른다.

저자의 분석은 20여 년 전 클레이턴 크리스텐슨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가 주창한 ‘파괴적 혁신’과도 비교된다. 크리스텐슨 교수가 내세운 것은 기술 혁신이었다. 기존 기업의 실패는 오만함과 조직문화의 신기술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봤다. 하지만 파괴적 혁신 이론은 오늘의 시장엔 맞지 않는 틀이란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는 모든 변화는 새로운 기술이 아니라 ‘고객이 자신의 시간과 노력, 돈 등을 줄이기 위해 하는 행동’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책은 많은 기업이 외치는 ‘고객 중심’의 진정성을 돌아보게 한다. 예를 들어 책의 일부만 보고 싶어 하는 독자층이 많다면 그 수요를 어떻게 활용할까. 대부분의 출판사나 서점은 그 부분을 내세워 책의 판매 실적을 올리려는 마케팅을 벌일 것이다. 하지만 아마존은 낱장 형태로 책을 판매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고객이 진짜 원하는 서비스를 즉각 제공했다. 당장의 이득보다 지속 가능한 관계의 구조를 만들었다.

저자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1990년대 말 카메라업계의 선두였던 미국 코닥과 일본 후지를 언급한다. 지금 그 자리는 애플과 삼성이 대신하고 있다. 카메라 화소가 올라갈 때마다 새 제품을 사던 고객들은 화질이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르자 선택의 기준을 단순함과 편리함으로 바꿨다. 좋은 사진을 찍는 것보다 빨리 공유하는 게 더 중요해졌다. 저자는 “최고의 위치를 유지한다는 것이 반드시 더 나은 제품을 보유하고 있거나 고품질의 제품을 내놓는다는 뜻은 아니다”고 강조한다.

책은 시장 파괴자의 공격에 어떻게 맞설 것인지, 어떻게 기존 시장을 뒤엎는 파괴적 비즈니스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인지도 실무적인 측면에서 조언한다. 더불어 기술에만 얽매여 소비자의 변화를 간과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묻는다. “신기술은 언제나 등장하고 고객이 원하는 것은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다. 기술이 남아있는 것은 고객이 사용하겠다고 선택했기 때문이다.”

윤정현 기자 hi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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