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논설실] 희대의 금융사기 '라임 사태', 금감원은 책임 없나

입력 2020-02-14 10:04   수정 2020-02-14 11:49


예상못한 '역대급 사건'은 봉준호 감독의 오스카 싹쓸이만은 아니다. 금융시장에서도 그에 못지 않은 역대급 사건이 한창이다. 나쁜 의미에서의 역대급이라는 점이 다르긴 하지만 전대미문이라는 대목에서는 별반 차이가 없다.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는 '라임 사태' 얘기다.

윤석헌 금융감독원장은 지난해 국회에 나가 "라임이 유동성 확보에 실수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취지로 설명했다. 하지만 까면 깔수록 단순 유동성부족 문제가 아니라 듣도 보도 못한 '희대의 금융사기'로 치닫고 있다. 직접 피해액만 2조원 선으로 기록적이라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은행 증권 자산운용 '제도권' 금융회사들이 일제히 탐욕의 주역이 돼 펀드투자자들을 기만한 정황이 속속 드러나 충격을 준다.

이런 혼란의 중심에 총수익스와프(TRS·Total Return Swap)이라는 파생상품이 자리한다. 헤지펀드 전문회사인 라임자산운용이 증권사들과 맺은 채권 TRS계약이 사실상 '파킹 거래'라는 의혹에서부터 사태가 출발했다. 펀드는 코스닥 부실기업의 전환사채(CB) 신주인수권부사채(BW) 등 메자닌에 대규모로 투자했고, 이 과정에서 채권보유한도 제한 규정 등을 피하기 위해 TRS계약을 활용하며 위험을 키우다 파국을 자초하고 말았다.

용어가 낯설지만 총수익스와프(TRS)는 그리 어려운 개념은 아니다. 우선 '스왑'은 두 거래당사자가 현금흐름을 교환(스와프)하는 계약이다. 보유자산에서 불확실한 현금흐름(수익)을 얻는 투자자가 위험을 줄이기 위해 확실한 현금흐름(고정 수익)과 교환하는 거래가 일반적이다. 대상자산이 주식 채권 메자닌일 경우 TRS계약을 통해 증권사는 운용사(헤지펀드)를 대신해 해당 자산을 매입하고 그 댓가로 수수료를 받는다. 금융회사는 자산보유로 져야할 신용위험을 헤지(hedge)할 수 있고, 헤지펀드는 자산을 보유하지 않고도 보유한 것과 같은 수익구조를 가질 수 있다. TRS계약을 통해 금융회사는 고정수익을 확보하고, 헤지펀드는 자금이 없어도 많은 대출(레버리지)을 받을 수 있어 헤지펀드계에서 일상화된 거래다. 하지만 펀드수익률이 추락하면서 금융회사들이 TRS계약 해지에 나서자 대출금을 돌려주기 힘들어진 헤지펀드들은 환매중단을 선언할 수 밖에 없었다.

한국 금융업계에 'TRS 악몽'이 처음 덮친 것은 외환위기가 터지기 직전인 1997년 상반기다. 당시 7개 기업(금융회사 6곳,제조업체 1곳)이 글로벌투자은행 JP모간과 태국 바트화를 연계로 한 TRS 계약을 맺었다. '30%의 수익이 가능하며, 바트화 폭락 위험은 거의 없다'는 꾀임에 넘어가 위험을 간과하고 말았다. 하지만 계약 직후 동남아 외환위기 발발로 바트화는 폭락했고 국내기업들은 총 8억600만달러의 피해를 입었다. 이후 긴 소송을 했지만 7개사와 3개 보증은행 중 9곳이 공중분해되거나 매각 혹은 합병됐다.

SK증권 등 국내 금융사들은 "TRS계약은 사기"라며 소송을 제기했지만 이어지는 대외신인도 하락을 견디지 못하고 대부분 '합의'로 마무리했다. 끝까지 소송해 이긴 곳은 대한생명이 유일했다.특히 SK증권은 JP모간과의 화해 과정에서 불법적인 이면계약을 한 사실이 적발돼 최태원 SK 회장이 구속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무지와 과욕이 빚은 파국적 결과였다.

그렇게 비싼 수업료를 치른 금융회사들이 꼭 그 방식대로 펀드투자자들을 농락했다는 점에서 라임사태의 심각성은 더한다. 며칠 전에 나온 삼일회계법인의 실사결과 펀드의 예상회수율은 50~77%에 불과했다. 현 시점에서 50~33%의 투자금 손실이 발생한 셈이다. 더 큰 문제는 TRS 계약상 자금을 제공한 증권사가 선순위로 대출금을 회수한뒤, 남은 금액을 일반 펀드가입자들이 투자금 비율에 따라 나눠받게 된다는 점이다. TRS계약 규모가 펀드자산의 절반에 달하는 사례도 적지 않아 펀드가입자들의 회수율이 거의 0이 되는 경우가 속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TRS 관련 위험을 대부분 펀드가입자들은 사전에 통보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기에 가깝다는 지적이 불가피하다.

TRS리스크는 금융업계만의 문제가 아니다. 많은 한국 기업들이 TRS 관련 혼란에 직면하고 있다. 투기펀드 엘리엇의 공격을 받은 삼성물산이 대표적이다.엘리엇은 국내 외국계증권사와의 TRS계약을 통해 은닉 지분을 확보한 뒤 하루만에 '5% 보유자'로 기습신고하며 불공정게임을 벌였다. TRS계약시 형식상 자산보유자는 펀드가 아닌 증권사라는 점을 악용한 사실상의 차명보유였던 셈이다. 엘리엇과 한국 정부의 ISD소송도 TRS를 활용한 차명보유 여부가 핵심쟁점이다. 그외에도 금호 두산 롯데 코오롱 한진 현대 SK그룹 등이 TRS계약 관련한 논란에 휩싸인 상태이며, 효성은 오너일가가 공정위에 의해 고발까지 됐다.

외환위기 때의 값비싼 실패에도 시장을 방치한 금융당국의 무능과 게으름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의결권 은닉, 5%룰 회피, 자본시장법상 레버리지 한도 규제 무력화, 조세 회피 등 많은 문제가 그대로 방치된 상태다. 외국에서는 일정기간 TRS계약을 유지토록 하는 등의 안전장치를 두는 경우가 많지만 한국 당국은 예방조치에 소홀해 '펀드런' 위험마저 키우고 있다.

금융당국은 오늘(14일) 라임 조사결과와 대책을 발표하며 뒤늦게 수습에 나선 모양새다. 하지만 금융소비자보호를 제일의 덕목으로 삼는다면서 권한 다툼이나 하면서 부실감독 책임은 모르쇠하는 반복적인 행태를 볼 때 큰 기대는 힘들다. 적절한 '게임의 규칙'을 세워 TRS시장을 건전하게 성장시키는 대신 감독을 강화한다며 관치 확대로 치닫지 않을까 우려도 더한다. 이 판국에 라임사태 같은 복잡한 사건을 수사할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도 해체돼 기능이 크게 위축됐다. 23년째인 한국 금융시장의 'TRS 악몽'은 당분가 더 지속될 것 같다.

백광엽 논설위원 kecore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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