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책 '도구' 된 국민연금…노후가 불안하다

입력 2020-02-18 17:40   수정 2020-02-19 09:26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가 투자 기업에 대한 의결권 행사 방향 등을 결정하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를 상설조직화하는 등 위상을 대폭 강화한다. 기금운용위는 지난 17일 수탁자책임전문위에 전문위원 9명을 두기로 의결하고 인선에 들어갔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가진 기업은 313개에 이른다. 국민연금은 “더 전문적인 주주권 행사가 가능해졌다”고 설명하지만 기업들은 “경영 개입이 본격화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국민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이 30여 년 뒤인 2054년이면 재정이 바닥날 위기인데도 연금제도 개혁, 수익률 제고 노력 등은 뒷전으로 밀려나고 정부의 정책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비판이 커지고 있다. ‘연금 사회주의’ 논란까지 불러온 과도한 경영 개입뿐만이 아니다. 총선을 앞두고 최근 정치권에선 ‘국민연금이 사업비를 대는 20평 아파트 100만 가구를 1억원에 공급하겠다’는 공약도 등장했다. 정부 안에서도 적립금을 헐어 보육, 임대주택, 요양 등의 공공사업에 쓰자는 논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국민연금이 정책 수단으로 동원되는 것은 낡은 의사결정 구조 때문이다. 기금 운영위원 20명 중 가입자 대표는 6명(근로자·기업 대표 각 3명)에 불과한데 정부 위원은 당연직 8명과 시민단체 추천 6명을 합해 14명이나 된다. 돈을 한 푼도 내지 않는 정부가 국민 노후자금 운용을 맘대로 결정할 수 있는 구조다. 정책 우선순위에 밀리다 보니 기금 운용 수익률도 저조하다. 일본 노르웨이 네덜란드 캐나다 등 4개국의 5년(2014~2018년) 장기수익률이 연평균 4.4~10.7% 수준인데 한국은 4.2%였다. 최광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정치적인 목적에 국민 노후 자금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hr style="display:block !important; margin:25px 0; border:1px solid #c3c3c3" />국민연금 30년 뒤 바닥인데
수익률 뒷전, 기업경영 개입에만 '골몰'


국민연금 최고 의사결정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가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의 위상을 대폭 강화하면서 정부가 국민연금을 통한 기업 경영 개입을 본격화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지난 17일 기금운용위 의결안에 따르면 수탁자책임전문위는 국내 313개 주요 상장사(지분 5% 이상)에 대한 경영 개입에 사실상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됐다. 이전에는 국민연금의 투자실무조직인 기금운용본부가 의결권 행사 방향 등에 대해 수탁자책임전문위에 의견을 물은 뒤 이를 의사결정에 반영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앞으로 수탁자책임전문위는 기금운용본부의 요청 없이도 자체적으로 안건을 찾아 결정할 수 있다. 위원장을 비롯한 3명은 상근직으로 구성된다.

수탁자책임전문위는 9명의 위원 중 근로자, 기업, 지역가입자를 제외한 나머지 6명을 보건복지부 장관이 위촉하는 구조다. 가입자들의 대표성을 반영한 인사 대신 정부 입맛에 맞는 인사들이 자리를 꿰차면서 국내 주요 기업에 대한 압박이 심해지고, 기금이 공공투자 재원으로 활용되는 등 정책 도구로 전락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고갈 시점은 빨라지는데…

현재 국민연금 적립금은 700조원을 넘고 공적연금 기금 규모로는 세계 5위 수준이다. 그러나 불과 30여 년 뒤인 2054년이면 바닥난다는 것이 국회예산정책처 전망이다. 1년 전의 정부 전망치보다 3년 빨라진 것이어서 우려가 커지고 있다. 급속한 인구 고령화로 연금보험료 지출이 늘어나는 것이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외국에 비해 저조한 기금운용 수익률도 문제다. 일본공적연금기금(GPIF), 노르웨이국부펀드(GPFG), 네덜란드공적연금(ABP), 캐나다공적연금(CPP) 등 외국 주요 연기금의 5년(2014~2018년) 평균 수익률은 연 4.4~10.7% 수준인데 국민연금은 4.2%에 불과했다. 10년 평균 수익률도 비슷한 상황이다. 비록 지난해 기금운용 수익률 11%의 깜짝 성적표를 내놨지만 직전 연도인 2018년에는 0.92%의 손실을 기록하기도 했다.

정부가 주도하는 기금운용위원회

가입자 관점에서는 수익률이 기금운용의 최우선 순위다. 그럼에도 국민연금이 본연의 업무와 동떨어진 정부 정책에 동원되는 건 가입자들의 이해관계는 배제된 의사결정 구조 탓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국민연금은 연금 보험료 전액을 국민이 납부한다. 2018년 근로자, 기업, 지역가입자 등 국민이 낸 연금 보험료는 43조4491억원에 이른다. 반면 정부 부담은 국민연금공단 운영비 102억원에 그친다. 그런데도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는 정부 측 인사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다. 연금 보험료 납부액의 86.3%를 내는 근로자와 기업의 대표는 전체 위원 20명 가운데 6명에 불과하다. 정부는 관계부처 장·차관 등 당연직 8명이다. 지역 가입자를 대표하는 6명도 친정부 성향의 시민사회단체 관계자가 주로 위촉되는 점을 감안하면 정부 영향력이 압도적인 셈이다. 대표성, 독립성이 취약하다고 전문가들이 지적하는 이유다.

전문성·독립성 부족이 부른 낮은 수익

주요 선진국은 연기금 운용 정책을 정부와는 독립된 위원회에서 결정한다. 위원들도 철저히 금융·투자 전문가로 구성하고 있다. GPIF의 기금운용 및 투자 결정을 담당하는 경영위원회 위원은 민간 금융·투자전문가 중에서 공모를 거쳐 후생노동상이 위촉한다. GPFG, ABP, CPP 등도 예외 없이 금융·투자·기업경영 전문가로 구성한다. 기금 운용의 최우선 순위가 수익률 제고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기금운용위원회에 금융·투자 전문가가 한 사람도 없다. 기금운용위원회 산하에 전문위원회를 두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보조기구다. 국민연금의 수익률이 선진국에 비해 저조한 배경이다.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인 보건복지부 장관을 대통령이 임명하는 점을 감안하면 사실상 정권의 의사가 기금운용 정책을 좌우하는 구조다.

최광 전 복지부 장관은 “정부가 국민연금 기금으로 기업을 통제하겠다는 생각은 매우 부적절하다”며 “국민들이 노후를 대비해 적립해 놓은 기금을 어떻게 운용할지에 관한 결정권은 이제 가입자에게 돌려줘야 할 때”라고 말했다. 최준선 성균관대 명예교수는 “국민연금 기금운용위원회의 대표성과 독립성, 전문성 제고가 시급한 과제”라고 지적했다.

최종석 전문위원 js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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