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없는리뷰]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안기는 역설의 미학

입력 2020-02-27 11:00   수정 2020-02-27 19:34


|영화인의 인생 응원가 ‘찬실이’…주체적 자세로 꿈은 또렷하게
|상실로 복을 얻듯 관객에게 독립 영화는 복주머니

[김영재 기자] A가 말했다. “보다가 졸았어.” B가 맞장구를 쳤다. “원래 독립 영화는 졸면서 보는 거야.”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감독 김초희)’ 언론시사회가 끝나고 우연히 듣게 된 대화 중 일부다. 그렇다면 과연 독립 영화는 죄다 ‘졸린 영화’일까.

물론 잠이 솔솔 오는 영화도 있다. 하지만 개중에는 잠이 달아나는 영화도 많다. 그리고 그 재미 여부는 관객이 얼마나 배경지식을 갖고 있냐에 달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 역시 마찬가지다. 이 영화는 김초희 감독을 얼마나 이해하냐에 따라 재미가 있고 없고가 결정되는 작품이다. 자전적이고, 때로 실화극 같기도 하다.


▶감독 이야기가 곧 주인공 이야기…인생에 위기가 닥쳤다면

“그분 소원이 지 감독님보다 하루 더 사는 거였다는데.” 영화 프로듀서 찬실(강말금)은 요즘 배우 소피(윤승아)네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같이 일하던 지 감독(서상원)이 갑자기 죽고 난 후 더는 아무도 그를 안 찾기 때문이다. 올해로 마흔이 된 찬실 곁에는 집도, 일도, 게다가 남자도 없다. 아니, 남자는 있다. 소피에게 불어를 가르치는 영(배유람)의 존재다. 악수부터 전기가 오른 영에게 마음을 뺏긴 찬실은 “무조건 직진”을 외친다.

파리 제1대학교에서 영화 이론을 전공한 김초희 감독은, 홍상수 감독의 전원사에서 프로듀서로 일해 온 실력파 영화인이다. 극 중 박 대표(최화정)는 찬실에게 지 감독의 영화를 “유일무이한 예술 영화”라 부르는데, 이는 홍상수 감독이 지 감독의 모티브라고 아주 대놓고 가리키는 대목이다. 과거 한 인터뷰에서 좋은 영화가 세상에 나오게 하는 것에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시기가 와서 메가폰을 잡게 됐다고 밝힌 김초희 감독. 그는 시작부터 쇼팽의 ‘장송 행진곡’ 아래 지 감독을 살해(?)함으로써, 생애 첫 장편 영화가 홍상수 감독에게 수학한 ‘아무개’의 것이 아닌 온전히 ‘김초희’의 것임을 유머러스하게 짚는다.

프로듀서가 배우 집에서 허드렛일을 한다는 수직 관계로의 전환 역시 현실이 기반이다. 영화 일을 그만두려고 반찬 장사까지 고민한 김초희 감독은, 배우 윤여정의 사투리 선생님으로 일하게 된 것에서 해당 이야기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영화를 향한 찬실의 순정도 감독이 출발점이다. 먼저 장국영은 김초희 감독이 어렸을 적 열광한 홍콩 영화의 유산이다.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영화 ‘동경 이야기’는 시네필 때의 존경이고, 특히 씨네21과의 인터뷰에 따르면 영화 ‘집시의 시간’은 유학을 가기 위해 6년간 비디오 가게에서 일할 시절에 마음에 새긴 작품이다. 셋이 왜 등장하냐를 알고 모르고의 차이가 크다.

나무에 열린 모과를 보고 찬실은 그 자신과 닮았는지를 자문한다. 누구 하나 따 먹지 않고 그저 존재할 뿐인 모과. 감독이 죽고 ‘낙동강 오리알’ 신세가 된 찬실. 둘 다 그가 없어도 세상은 굴러가는 풍경 같은 존재다. 만약 ‘이찬실’이 소설이라면 찬실은 지 감독을 그 책의 주인공으로 삼았고, 그렇기에 주인공이 죽고 곧 소설은 쓸모없는 것이 되고 만다. 김초희 감독은 삶에 위기를 맞은 찬실에 본인의 과거를 투영, 과거 그가 어떻게 인생의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었는지를 윤여정의 말대로 “해학적으로” 전달한다.


▶찬반 나뉘는 자전적 영화…‘찬실이’의 강점? 웃픈 것!

자전적 영화를 향한 시선은 다 제각각이다. “자전적 이야기를 만든다는 것은 그 말 자체가 불가능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차피 다 해석이 들어가고, 미화나 왜곡이 있으니까요.” 홍상수 감독은 그가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 개인적 디테일을 사용한 것과 관련해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자전적 이야기를 작품에 녹여낼 생각은 없다고 단언했다.

반면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은 영화 ‘페인 앤 글로리’에서 대표작 ‘나쁜 교육’ ‘내 어머니의 모든 것’ ‘귀향’을 중첩한 것은 물론, 그의 생을 적극 용해했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영화 ‘8과 2분의 1’과 마찬가지로 향수에 젖은 기억에 영감을 받은 캐릭터가 다수 등장하고, 그 자기 고백은 애상적이기보다 진솔하다. 그래서 감동적이다.

귀도가 그가 흠모하는 여성을 하렘에 집합시킨 것과 찬실이 어렸을 적 그가 진짜 좋아한 장국영(김영민)과 한집에 사는 것이 초현실성으로 같다면, 페이소스가 있는 웃음은 오직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것이다. “와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라는 마흔 살 찬실의 자책은 슬픔과 웃음의 교집합이다.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회피도 재밌다. 꿈인지 생시인지 몰라 제 뺨을 때린 후 갑자기 남 탓을 하는 찬실의 모습은, 배우 강말금의 “진정성” 있는 얼굴과 밝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연기로 관객의 경계(警戒)를 순식간에 무너뜨린다.


▶주인공으로 진정 원하는 것을 좇자…독립 영화의 관념은 복

김초희 감독이 강조하는 바는 두 가지다. 하나는 “그대들이 어디를 가나 주인공이 되니 자기가 있는 그곳이 모두 참된 곳”이라는 뜻의 ‘수처작주 입처개진’이다.

찬실이 ‘동경 이야기’에 관해 별것 아닌 것이 제일 소중한 것이라 역정을 내는 데에는, 비록 특별한 것은 없어도 삶 또한 제 가치가 있다는 감독의 강조가 담겨 있다. 하고 싶은 일이 너무 많은 소피와 하고 싶은 일을 못 찾고 방황하는 찬실, 하고 싶은 일이 아예 없는 복실(윤여정)의 공통점은 주어진 조건이 어떻든 주인공으로서 삶을 열심히 살아 낸다는 것. 그 과정에서 알알이 스며드는 시간의 결은 개개를 완성하는 완벽한 자양분이다.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 등장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자세히 오래 보는 것으로 나 자신부터 본인의 가치를 알아봐야 한다는 조언이 본작의 메시지와 아주 찰떡같다.

다음은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이다.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 그냥 되는 대로 사니 / 사사 사는 대로 사니 가는 대로 사니 / 그냥 되는 대로 사니”. 가수 신해철이 부른 것처럼 사는 대로 사는 것과 생각한 대로 사는 것의 차이는 전부를 걸어 보고 싶은 마음의 발로다. 종국에 찬실이 겪는 체험은 어떤 목적을 띠고 좋아하는 일을 할 것이 아니라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전한다.

제목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복은 사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그 복(福)이 아니라 화(禍)에 가깝다. 그에게는 집도 없고, 돈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서다. 하지만 김초희 감독은 힘들어도 그 과정에서 많은 것을 다양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이 찬실의 복이라 했다.

‘독립 영화는 졸리다’는 명제도 거꾸로 생각해 보는 것은 어떨까. 우선 독립 영화가 졸린 것은 추상적인 데다 관념에만 사로잡힌 경우가 대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관념, 즉 어떤 일에 대한 견해와 생각은 주류 영화에서는 수박 겉핥는 식으로 스쳐 지나가는 것이 보통. 그러하다면 이 작은 영화의 ‘그럼에도 희망을 꿈꾸자’는 관념은 지금 당장은 지루한 웅변일 테지만, 지나고 보면 복을 부르는 고마운 이정표로 거듭날 가능성이 농후하다. 찬실(燦實)에게 상실(喪失)이 복을 가져왔듯 말이다. 뭐, 역설의 미학이 별것이겠는가.

제24회 부산국제영화제 한국영화감독조합상, CGV아트하우스상, KBS독립영화상 및 제45회 서울독립영화제 관객상 수상작. 전체 관람가. 96분.(사진제공: 찬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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