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봄날 '세한도'를 다시 펴는 까닭

입력 2020-04-03 17:44   수정 2020-04-04 00:08

추사 김정희는 곰보였다. 마마를 앓은 자국이 얼굴 곳곳에 있었다. 조선시대 마마는 치사율이 30%에 이르는 1급 전염병이었다. 약도 없었다. 추사가 태어난 1786년에는 홍역이 온 나라를 휩쓸었다. 추사의 어머니는 한양에서 충남 예산으로 피신해 그를 낳았다. 그해 정조 아들(문효세자)까지 급사할 정도로 전염병이 심했지만, 추사는 살아남았다.

생애 첫 역경을 이겨낸 그는 10대에 또 다른 아픔을 겪었다. 열네 살에 어머니를 병으로 여의고, 열아홉에 첫 부인을 잃었다. 스승인 박제가의 별세에 이어 새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다. 3년상(喪)을 치른 그는 23세에 생원시를 통과했고, 33세가 되어서야 대과에 급제했다.

암행어사가 돼 탐관오리들을 처벌한 일로 그는 세도 정권의 표적이 됐다. 이 때문에 훗날 반대파의 숙청에 휘말려 사형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동안 문턱이 닳도록 그를 찾던 벼슬아치들의 발길은 뚝 끊겼다.


54세 때인 1840년, 그는 여섯 차례의 국문 끝에 초주검이 돼 제주도 대정골에 유배됐다. 가까스로 죽음은 면했지만 도성에서 가장 먼 섬으로 쫓겨났으니 돌아갈 기약이 없었다. 언제 사약을 받으라는 금부도사의 행차가 있을지 모르는 나날이었다.

이런 시련 속에서 그가 피워낸 꽃이 ‘세한도(歲寒圖)’다. 한겨울, 초라한 토담집 한 채를 사이에 두고 소나무와 잣나무가 서 있는 풍경은 쓸쓸하고 적막하다. 갈필로 거칠게 붓질한 이 수묵화는 조선 문인화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세한도’에는 겨울에도 시들지 않는 소나무와 잣나무처럼 세월이 바뀌어도 변하지 않는 정신의 품격이 새겨져 있다. 추사는 그림의 발문에서 선비의 지조와 의리를 지킨 제자 이상적에게 이 그림을 준다고 밝혔다. 모두에게 버림받은 유배객을 잊지 않고 중국에서 귀한 서적 등을 구해 보내는 등 극진한 마음을 바친 그에게 추사는 《논어》의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柏之後凋·추위가 닥친 뒤라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은 것을 안다)’ 대목을 인용하며 고마움을 표했다.

제목의 ‘세한도’는 ‘추운 계절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 추위는 엄혹한 세태를 상징하기도 한다. 그 속에는 ‘그림에서 문자향서권기(文字香書卷氣·문자의 향기와 서책의 기운)가 느껴져야 한다’는 추사 특유의 화론(畵論)이 녹아 있다.

또 다른 작품 ‘부작란(不作蘭)’에도 추사의 사상이 담겨 있다. 난을 그리고도 그것을 그리지 않았다는 제목의 이 그림에 그는 ‘난을 치지 않은 지 스무 해 만에 뜻하지 않게 깊은 마음속 하늘을 그려냈다’는 글귀를 덧붙였다. 엷은 먹빛으로 그린 난은 연약한 듯하지만 구부러진 획에서는 강인한 힘이 느껴진다.

이근배 시인은 이 그림을 보고 쓴 시 ‘부작란(不作蘭)’에서 ‘획 하나 읽는 줄도 모르는 까막눈이/저 높은 신필을 어찌 넘겨나 볼 것인가/세한도 지지 않는 슬픔 그도 새겨 헤아리며//시간도 스무 해쯤 파지를 내다보면/어느 날 붓이 서서 가는 길 찾아질까/부작란 한 잎이라도 틔울 날이 있을까’라고 노래했다.

9년간의 유배기에 추사의 바다는 온통 먹빛이었다. 외롭고 쓸쓸한 적소(謫所)의 어둠을 뚫고 그는 붓을 세 번 꺾어 난을 치는 ‘부작란’을 그렸다. 그 ‘신필’의 경지처럼 한 20년쯤 ‘시간의 파지’를 내다보면 우리도 ‘붓이 서서 가는’ 명철의 경계를 넘겨다 볼 수 있을지, 시인의 소망처럼 ‘부작란 한 잎이라도 틔울 날’이 있을지….

추사는 슬프거나 힘들 때, 억울할 때에도 붓을 들었다. 글씨가 마음에 들 때까지 다시 썼다. 그렇게 쓰고 또 쓴 글씨로 마침내 추사체(秋史體)를 완성했다. 70평생 열 개의 벼루를 갈아 없애고 1000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던 그의 글씨와 그림을 구하려고 조선을 넘어 청나라와 일본에서도 문인들이 줄을 섰다.

시·서·화에 금석학까지 아우른 그는 북학(北學)과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을 중시한 학자이자 동양 3국의 문물 교류에 앞장선 글로벌 지식인이었다. 경제(經濟)의 어원인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주창자이기도 했다. 거상(巨商) 임상옥과 함께 청나라에 갔을 때 인삼을 불태우도록 조언한 주인공 역시 그였다.

그의 ‘세한도’는 지금 우리에게 엄동설한을 맨몸으로 꿋꿋이 이겨내는 송백의 정신을 일깨워준다. 권력지향적인 세태의 어둠도 거울처럼 되비춘다.

봄이라지만 진정한 봄은 아직 멀었다. 200여 년 전 추사를 괴롭힌 것보다 더한 ‘코로나 쇼크’ 때문에 모두들 힘겨워 한다. 총선을 앞둔 정치권의 난장까지 겹쳐 세상이 더욱 혼탁하다.

향기로운 꽃망울을 어루만지며 진짜 봄의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날은 언제쯤 올까. 하루빨리 그날이 와 마음속 부작란 한 잎이라도 틔울 수 있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으로 이 아침 ‘세한도’를 다시 펼친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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