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고구려 계승한 '황제국' 발해…연해주 북부까지 영향력 뻗쳤다

입력 2020-04-03 17:11   수정 2020-04-04 01:33


나라가 망해 포로가 돼서도 굴복하지 않은 채 30년 동안 기회를 노리다가 복국(復國)의 희망을 안고 대탈출을 감행한 발해인들. 2000여 리(里·800여㎞) 길에 겪은 고생도 그렇지만, 그 마음과 꿈을 떠올리면 숙연해질 수밖에 없다.

2002년 중국 정부는 동북공정(東北工程: 중국 국경 안에서 전개된 모든 역사를 중국의 역사로 편입하려는 연구 프로젝트)을 추진하면서 고구려를 중국 역사로 변조하고, 발해를 말갈인이 세운 지방정권이라고 주장했다. 지금은 모든 박물관, 전시관, 역사책, 교과서에서 ‘발해’를 지웠으며, 때때로 ‘발해도독부(都督府)’라고 서술한다.

발해는 우리의 역사인가? 중국의 역사인가? 발해의 고구려 정통성과 한민족 계열성은 국호와 주민들 성분에서 확인할 수 있다. 727년에 2대 무왕은 유민들의 상황을 살펴보고, 국교를 수립할 목적으로 일본국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런데 하이(아이누족) 땅에 표착한 24명 가운데 수령인 고제덕 등 8명만 생존했다. 갖고 간 국서(國書)는 ‘고구려의 옛 영토를 회복하고 부여에서 전해 내려온 풍속을 간직하고 있다’고 선언하고 있다. 3대 문왕이 보낸 국서에도 ‘고(구)려의 왕 대흠무가 말한다…’고 썼다. 일본 또한 ‘발해는 옛날 고구려다’고 기록했으며(《속일본기》), 발해에 파견한 사신을 ‘고려사’라고 불렀다. 초기에 파견한 사신단에는 유민으로 정착한 ‘고려씨’들이 포함됐고, 당시 목간이나 그릇, 파편 등에는 ‘고려’라는 글자가 남아 있다. 중국과 신라 기록에는 ‘진(振·震)’ ‘발해’ ‘북국’ 등의 용어가 있다. 그러나 중국은 최근 태도를 바꿔 ‘말갈국’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발해인들의 자의식과 자기 발언, 일본의 기록으로 볼 때 첫 국호는 ‘고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된 발해

발해는 대부분 고구려 유민들로 구성됐다. 《삼국사기》는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이다’, 또 발해를 무척 싫어한 최치원은 ‘고구려의 잔당들이 무리를 모아 북쪽의 태백산 밑을 근거지로 삼아 나라 이름을 발해라 했다’고 기록해 발해민은 고구려의 후예임을 알려줬다. 《삼국유사》는 ‘《신라고기》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옛 장수인 조영은 성이 대(大)씨이며, 남은 병사들을 모아 태백산 남쪽에 나라를 세우고 이름을 발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중국의 《구당서》는 ‘(발해) 풍속이 고구려 및 거란과 같다’고 했고,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이다(大祚榮者 本高麗別種也)’고 썼다. 중국은 ‘별종’을 강조하면서 다른 종족이라는 듯 주장하지만, ‘고려(고구려)는 본래 부여의 별종이다(高麗本夫餘別種也)’나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百濟夫餘別種也)’ 등에서 볼 수 있듯 ‘별종’은 갈래 집단임을 표현한 단어다.

또 일본인들은 역사책 《류취국사》의 말갈 서술 부분을 인용해 발해의 지배층은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고, 피지배층은 다수의 말갈인이라고 주장했고, 한국은 이를 추종했다. 그런데 이는 북만주와 동만주, 연해주 일대의 거친 자연환경과 주민들의 숫자, 관리 방식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소수인 속말말갈(말갈의 한 부족)은 본래 고구려의 구성원이었고, 발해는 이를 계승했을 뿐이다. 당연히 ‘대씨’ ‘고씨’ 등의 고구려 유민들이 주도한 혼합종족체제일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天孫으로 칭한 발해 왕

고구려 계승성은 발해민들의 자의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속일본기》에는 발해 임금이 스스로를 ‘천손(天孫)’으로 칭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정효공주묘의 묘지(墓誌)에 따르면 문왕은 ‘황상(皇上)’ ‘성법대왕’이란 호칭을 받았고, ‘대흥’ ‘보력’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이후 11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임금이 연호를 사용했다. 또 황제국체제처럼 ‘공(公)·후(侯)·백(伯)·자(子)·남(男)’이란 봉작을 사용했고, 지방 토착세력을 ‘수령’이라고 불렀다. 반면 통일신라는 연호를 사용하지 않았으며, 자의식이 미약했음을 부정하기 힘들다. 그 밖에도 고구려 계승성은 온돌, 복식, 무덤과 축성 양식을 비롯해 제철 기술, 말 사육과 무역 등의 산업, 매사냥 등의 풍습 등에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다.

고왕(대조영)은 700년에 ‘진국’이라는 이름으로 신라에 사신을 파견했으며, 705년에는 당나라와 사신을 교환했다. 우호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는 국제환경 속에서 당나라는 713년에 대조영에게 ‘발해군왕 홀한주도독(渤海郡王 忽汗州都督)’이란 지위를 줬다. 그런데 2대 무왕은 적극적으로 국제질서에 참여해 북으로는 흑수말갈, 서로는 당나라와 전쟁을 벌였다. 732년 9월, 장문휴가 거느린 함대는 압록강 하구인 박작구를 출항했다. 요동반도 남쪽 해양과 묘도군도를 경유해 전광석화처럼 산둥반도 북부에 상륙한 군대는 자사(지방 감찰관)인 위준을 죽이고 등주성을 점령했다. 한편 무왕은 육군을 거느리고 거란의 도움을 받아가며 요서지방을 공격해 승리를 거뒀다. 이때 당나라는 남쪽에서 발해를 공격하도록 신라를 압박했으나, 733년에 출동한 신라는 폭설을 핑계 삼아 도중에 철군했다. 이 승리로 발해는 강국으로 발돋움했으며, 당은 738년 등주에 발해관(渤海館: 발해 사신이 머물던 숙소)을 설치해 발해 사신단 및 승려들의 방문과 무역에 협조했다.

발해와 신라는 기본적으로 적대관계였으므로, 신라는 동북 변경에 장성을 쌓았다. 발해가 신라도(新羅道)를 개통했음에도 불구하고 790년과 812년에만 사신을 파견했다. 한편 일본은 8세기 중반에 ‘신라정토론(新羅征討論)’을 내세워 대대적인 전쟁 준비를 선포했고, 공동의 적인 신라를 상대로 발해·일 동맹이 맺어졌다. 발해는 교류를 주도해 727년 이후 220여 년간 34회 사신단을 파견했고, 746년에는 민간인 1100명이 동해를 건너 혼슈 북부 해안에 상륙했다(윤명철, 《장보고시대의 해양활동과 동아지중해》·2002년).

만주 일대를 지배한 해동성국 발해

그럼 발해의 영토는 어느 정도였을까? 첫 수도인 동모산 지역은 좁았으므로 742년에 넓은 터인 중경 현덕부(화룡현 서고성)로 천도했다. 이어 755년에는 토지가 넓고, 목단강의 수원인 경박호가 있는 상경(홀한성, 흑룡강성 영안현 발해진)으로 천도했다. 다시 동경성(두만강 하구의 훈춘 일대)으로 옮겼으나, 9년 만인 794년에 상경으로 복귀했다. 이어 818년에 10대 선왕이 즉위하면서 급속하게 성장했다. 《신당서》는 ‘땅은 사방 5000리이며, 호구는 10여 만이고, 승병(勝兵)은 수만이다. 부여, 옥저, 변한, 조선 등 바다 북쪽에 있던 여러 나라의 땅을 거의 다 차지했다. 발해의 국토는 5경, 15부, 62주다’고 기록했으며,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고 칭송했다.

남으로는 대동강부터 원산까지, 서로는 요동반도까지, 북으로는 고구려도 관리하지 못했던 연해주 북부와 하바로프스크 일대까지 영향력을 미치는 광대한 제국이 됐다. 전에 우리 학자들은 일본 학계 주장을 수용해 요동을 뺀 채 압록강 하구에서 중만주 일대까지, 연해주 남부의 일부 지역까지가 발해 영토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북한, 중국, 특히 러시아 학자들의 발굴 덕분에 만주 일대가 대부분 발해 영토였다는 주장이 많아졌다(한규철 《발해의 대외관계사》). 그래서 고구려보다 영토가 1.5배나 넓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고구려의 정치체제와 지방 및 종족 관리 방식의 차이, 자연환경에 대한 검토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발해 연구 기반 더 다져야

일본은 만주 침탈을 목적으로, 중국은 자기 역사임을 주장하려고 그리고 러시아는 연해주 일대가 자국 영토임을 알리려고 발해를 연구했다. 통일신라, 고려, 조선 내내 무관심했던 우리는 유득공 등 실학자와 장도빈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발해 연구를 시작했다. 북한은 일찍부터 연구했고(박시형), 남한은 관심 부족 탓인지 1998년까지 박사 학위자가 세 명에 불과했다. 필자가 국정교과서 집필에 참여했을 때 발해를 ‘남북조 시대’ 범주에 넣고 싶었는데, ‘남북국 시대’라고 쓰는 것조차 힘들었던 게 사실이다.

발해인들이 강대국인 당나라를 물리치고, 빠른 기간에 대국을 이룩한 힘은 무엇일까? ‘세 명이면 호랑이 한 마리를 당한다(三人渤海當一虎)’는 용맹함 때문일까? 문자가 있었고(《구당서》 발해말갈전), 외국인만 응시하는 당나라 과거(빈공과)에서 많은 합격자를 낸 수준 높은 교육열과 문화에 대한 열정 때문일까? 아니면 국가 시스템이 철저하게 완비되고, 군사력과 기술력이 크게 높아진 덕분일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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