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입을 가리니 비로소 눈이 보이네

입력 2020-04-17 17:41   수정 2020-07-16 00:02

그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았다. 시간이 갈수록 눈꺼풀은 더 깊고 고요해졌다. 미간의 움직임에 따라 눈썹만 가끔씩 오르내릴 뿐이었다. 12세에 시력을 완전히 잃은 세계적인 테너 안드레아 보첼리(62). 그가 며칠 전 부활절에 이탈리아의 밀라노 두오모(대성당)에서 펼친 콘서트에는 관객이 한 명도 없었다. 유일한 사람은 파이프오르간 반주자인 에마누엘레 비아넬리였다.

평소 4만 명이 들어가는 성당의 텅 빈 공간에서 그는 전염병으로 고통받는 세계인을 위로하는 ‘희망을 위한 음악(Music for Hope)’ 콘서트를 펼쳤다. 은발에 짙은 회색 정장, 검은 나비넥타이 차림을 한 그는 프랑크의 ‘생명의 양식’과 구노 편곡의 ‘아베 마리아’, 마스카니의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 간주곡을 편곡한 ‘산타 마리아’, 로시니 미사곡 ‘도미네 데우스’를 구도자 같은 자세로 불렀다.

마지막에는 인적 없는 성당 광장으로 나가 ‘어메이징 그레이스’로 세계인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그사이 영상은 코로나19 사태로 대참사를 겪은 인근 도시 베르가모와 브레시아를 훑었다. 온 도시가 삭막했다. 확진자 17만 명에 사망자 2만2000명이 발생한 이탈리아 안에서도 가장 피해가 큰 곳이었다.

'부활의 노래'에 3700만명 울컥

지구촌의 다른 도시를 비출 때도 그랬다. 정적에 싸인 프랑스 파리의 에펠탑과 개선문 광장, 영국 런던 도심의 트래펄가 광장, 미국 뉴욕 맨해튼이 모두 멈췄다. 세계 곳곳을 비추는 영상을 배경으로 ‘부활의 노래’를 부르는 그의 모습은 성스러웠다. 공연 직전 그는 “실시간 중계되는 음악으로 전 세계인이 상처 입은 지구의 고동치는 심장을 함께 껴안을 것”이라고 했다.

그의 콘서트 실황은 안드레아 보첼리 재단에 의해 유튜브로 공개됐다. 25분짜리 이 영상의 조회수는 현재 3700만 건을 넘었다. 수많은 사람이 “세계를 보듬는 그의 위로와 축복에 큰 감동을 받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이보다 2주일 전인 지난달 말에는 세계적인 음악가 9명이 자신의 집에서 연주한 영상을 스마트폰에 담아 릴레이 공연을 펼쳤다. 음반사 도이치그라모폰이 마련한 이 온라인 콘서트에는 한국의 ‘쇼팽 콩쿠르 천재’ 조성진(26)을 비롯해 루돌프 부흐빈더, 마리아 조앙 피레스, 예브게니 키신 등 명피아니스트가 함께했다. 이들은 각자의 집에서 연주하는 영상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인터넷에서 30분 이내로 보여줬다.

조성진은 베를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연주복 대신 느슨한 셔츠를 입고 손때 묻은 피아노 앞에 앉아 브람스의 ‘인테르메조’를 연주해 전 세계 청중을 감동시켰다. 평소 스튜디오에서 녹음할 때도 일부러 청중을 만들어 연주하길 좋아하던 그였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그는 “요즘같이 힘든 시기에는 음악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며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곧 시련을 이겨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모니카 그뤼터스 독일 문화부 장관이 “창조적인 사람들의 용기가 이 위기를 극복하는 데 가장 필요하다”며 “지금 우리에게 예술가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적인 존재”라고 강조한 것과 맞닿은 말이다.

영혼의 밑바닥을 건드리는 손

예기치 못한 전염병은 실물경제와 문화예술이라는 삶의 두 축을 동시에 격리시켰다. 하지만 우리는 문화라는 백신과 예술이라는 치료제로 나와 타인을 함께 치유하고 위로해야 한다.

그 애틋한 공감의 현장에서 시각장애 성악가 보첼리는 마음의 창인 심안(心眼)과 영혼의 문인 영안(靈眼)을 통해 우리에게 희망을 선사했다. 조성진은 내로라하는 피아니스트들과 함께 심장의 밑바닥을 건드리는 손길로 우리 내면의 눈을 뜨게 해줬다.

그 덕분에 평소 몰랐던 사실이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가장 큰 발견은 사람들의 얼굴과 표정이었다. 모두가 마스크로 입을 가리고 대화를 나누다 보니, 비로소 상대의 눈이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의 입이 막히자 눈이 뜨이다니! 육체의 눈뿐만 아니라 마음의 눈, 영혼의 눈까지 밝아지면 더 많은 것이 달라 보일 것이다.

오는 7월에는 조성진이 새 앨범 ‘방랑자’를 들고 귀국해 전국 투어를 펼친다. 보첼리도 그가 태어난 마을 라하티코에서 1년에 한 번 여는 ‘고향 콘서트’를 갖는다. 그 산골 구릉에 있는 공연장 이름은 ‘침묵의 극장’이다. 올해 이들이 ‘심장을 두드리는 건반’과 ‘내면을 밝히는 눈’으로 어떤 세상을 보여줄지 벌써부터 내 마음의 눈이 환해진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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