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당보다 고용 유지하라"…글로벌 기관투자가들이 달라졌다

입력 2020-04-27 17:17   수정 2020-04-28 01:18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이후 전 세계 기업들이 현금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다. 미래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위해서다. 한 발 더 나아가 배당 및 자사주 매입 중단을 선언하는 글로벌 기업도 잇따르고 있다. GM JP모간체이스 HSBC AT&T 델타항공 엑슨모빌 갭 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가운데 글로벌 기관투자가들이 투자 기업을 향해 “배당을 늘리기보다 종업원 해고를 막는 게 더 중요하다”는 성명서를 내놓아 주목을 끌고 있다. 전문가들은 “코로나 대유행(팬데믹)을 계기로 전통적인 ‘주주 자본주의(shareholder capitalism)’가 시들해지고 종업원 협력사 고객 등까지 감안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stakeholder capitalism)’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고 분석한다.


기관투자가 “배당보다 종업원 보호”

국민연금 한국투자공사(KIC)를 포함해 45개국 연기금 및 자산운용사를 회원사로 두고 있는 국제기업지배구조연대(ICGN)는 지난 23일 투자 대상 기업들에 “배당이나 임원 보수를 늘리기보다 종업원의 해고를 피하고 거래처를 우선 배려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ICGN 회원사들의 운용 자산은 54조달러(약 6경6528조원)에 달한다.

지난 8일엔 일본 노무라그룹과 다이이치생명그룹, 네덜란드 연기금인 PGGM 등 50여 개 기관투자가가 글로벌 제약회사들을 상대로 “의료기관의 공급망 유지에 협력하고 연구 데이터를 공유해 코로나19 치료제를 공동으로 개발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들의 운용 자산은 2조6000억유로(약 3465조원) 규모다. 세계 최대 자산운용사인 블랙록과 피델리티도 제약회사들이 합심해 코로나19에 공동 대응할 것을 요청했다. 세계 연기금 및 기관투자가들이 배당 확대에 몰두하기보다 고용을 유지하고 코로나19 대처에 집중하라는 주문을 내놓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배당과 자사주 매입을 통해 주주 가치 극대화에 우선 순위를 뒀던 자세를 감안하면 이례적이라는 평가다.

이해관계자 자본주의 시대 온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기관투자가들의 이런 변화는 자본주의 기본 원리가 바뀌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분석했다. 기업이 주주를 위해 이익을 추구하면 경제 전체가 성장한다는 주주 자본주의가 저물고, 구성원 모두의 이익을 배려하는 이해관계자 자본주의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연기금들이 투자 기업을 대상으로 종업원 및 협력사를 보호하라고 나선 것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있다. 당시 상당수 미국 기업은 직원 해고로 유지한 이익을 주주 배당 및 자사주 매입에 썼다. 그 결과 빈부 격차가 커져 장기적으로 주주 가치가 훼손됐다는 것이 기관투자가들의 공통된 인식이다.

고배당을 요구해온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움직임도 둔화했다. 미 투자은행 라자드의 분석에 따르면 지난달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주주행동 건수는 16건(시가총액 5억달러 이상 기업 기준)으로, 예년보다 저조했다. 라자드는 “코로나19로 기업들이 현금 확보에 나서야 하는 상황에서 배당을 요구하는 게 쉽지 않다”고 했다. 오히려 투자 회사에 돈을 주는 행동주의 펀드까지 등장했다. 미 인게이지드캐피털은 자사 임원들이 올해 투자 기업 이사로 활동하며 받게 될 50만달러를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의 교훈”

2008년 금융위기 때 인력 구조조정을 통해 능력 있는 종업원을 떠나보낸 기업들이 결국 경쟁력을 잃었던 경험은 기관투자가들의 인식 전환에 큰 역할을 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대공황 이후 최악의 경제위기를 맞아 단기적인 이익에 급급하기보다 사회 문제에 공동 대처하는 게 장기적으로 더 이익이 될 것이란 접근법이다.

이런 인식 변화는 고용 유지를 최우선 과제로 놓고 사투를 벌이는 각국 정부에도 보탬이 될 전망이다. 미국과 일본은 무급 또는 유급휴직 제도를 운용하는 기업을 대상으로 임금을 보조해 준다. 싱가포르도 모든 기업을 대상으로 직원 급여의 75%를 지원한다. 독일 프랑스 중국 등도 고용을 유지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기관투자가들의 접근법이 바뀌자 기업들도 지속 가능한 성장 전략 도입으로 화답하고 있다. 금융위기 때 대규모로 자사주를 매입했던 미 통신회사인 AT&T와 의류회사 갭은 자사주 매입 대신 직원 보너스를 인상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이고운 기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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