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김아타 "존재 본질 찾아 헤맨지 30년…자연이 그리게 했죠"

입력 2020-04-30 17:47   수정 2020-05-01 02:44


육중한 문을 열고 들어서니 널찍한 실내가 어두컴컴하다. 200㎡가량의 실내 바닥엔 아무것도 없다. 희미한 조명 아래 보이는 것은 사방 벽에 붙여 놓은 거대한 검은색 작품들. 얼핏 보기엔 부조 같기도 하고, 입체회화 같기도 하고, 고대 지질시대의 지도를 그려놓은 것 같기도 하다. 천장 높이가 12m나 되는 어둑한 공간은 고요하다. 침묵과 어둠뿐인 공간에서 관객은 생각에 잠기고 성찰하게 된다. 존재의 근원은 무엇인가. 자연의 본성은 무엇인가.

사진작가 김아타 씨(64)가 경기 여주 점동면의 시골마을에 미술관 ‘블랙마운틴’을 열었다. 블랙마운틴은 미술관 이름이자 군부대 포 사격장 표적지에 대형 캔버스를 설치한 후 산산조각이 나 너덜너덜한 조각들을 수습해 패치워크(patchwork)한 작품들의 이름이다. 4000㎡가량의 대지에 블랙마운틴·갤러리 등 2개 동의 전시 공간과 작품 보관 창고 1개 동을 직접 설계하고 시공해 지었다.

미술관 블랙마운틴은 그가 10년째 진행 중인 ‘자연 하다. ON NATURE’ 프로젝트를 처음 소개하는 자리다. ‘자연 하다’는 자연이 그림을 그리게 하는 프로젝트다. 산과 바다, 사막, 도시 등 국내외 곳곳에 하얀 캔버스를 2년 남짓 세워두고 비바람, 눈보라의 흔적을 그대로 담아냈다. 2010년 강원 인제 강선마을의 숲속에 캔버스를 세운 것을 시작으로 석가모니가 명상하며 선정에 들었던 인도 부다가야 마하보디 사원, 미국 뉴멕시코 인디언 거주 지역, 칠레 아타카마 사막, 비무장지대 향로봉 등 국내외 70여 곳에 캔버스를 설치해 50여 점을 회수했다. 캔버스를 땅속에 묻었다가 썩고 해진 후 꺼내기도 했다.

회수한 후 보존 처리 과정을 거친 캔버스는 마치 작가가 의도한 것인 양 다양한 모습이다. 아타카마 사막의 모래바람을 견뎌낸 캔버스에는 모래가 촘촘히 박혀 있다. 인제 강선마을에 세웠던 캔버스에는 마치 한겨울 자작나무 숲의 설경 같은 그림이 그려졌다. 땅속에 7개월 동안 묻었다가 꺼낸 캔버스는 썩어서 너덜너덜했다. 그 조각을 짜맞추고 붉은색, 검은색을 칠하니 단색화 같은 작품이 됐다.

블랙마운틴 전시동에 전시된 10점의 블랙마운틴 작품도 ‘자연 하다’ 프로젝트의 하나다. 대포가 그린 그림이라니? 살상용 무기인 대포가 자연인가. 김씨는 “원시적인 투석으로부터 진화한 싸움의 기술도 인간 본성과 본능의 역기능일 뿐 자연의 일부”라고 설명했다. 자연의 일원인 인간이 저지르는 일 또한 자연 아니냐는 얘기다.

김씨는 2012년 포 사격장에 처음 캔버스를 세운 이래 몇 년 동안 산산조각 난 천을 수습했다. 상상을 벗어난 처참함에 절망했고, 다시 몇 년을 내적으로 성찰하며 상처를 정화시키고서야 ‘색 없는 색’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했다.

블랙마운틴의 블랙은 눈에 보이는 색이 아니라 마음의 색이다. 검은색은 단지 검다는 것이 아니라 그윽하고 가물가물하다는 뜻이다. ‘가물가물하고 또 가물가물해 모든 미묘한 것들을 이해하는 관문(玄之又玄 衆妙之門·현지우현 중묘지문)’이라는 노자 《도덕경》의 구절이나 불교의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을 떠올리게 한다. 블랙마운틴 전시동을 치유와 성찰을 위한 사유와 사색의 공간으로 조성한 이유다.

김씨는 일찍부터 파격적 연출과 구성의 사진으로 새로운 예술적 담론을 던지며 주목받아온 작가다. 알몸의 여성들을 산과 들판에 흩뿌려 놓았던 ‘해체’시리즈, 벌거벗은 남녀들을 법당의 불단에 앉히고, 투명한 아크릴 상자에 알몸의 사람을 전시한 ‘뮤지엄 프로젝트’, 세계적 도시와 거장의 작품, 팔만대장경 등의 수많은 이미지를 장시간 노출과 다중인화 방식으로 겹쳐 공(空)의 세계를 보여준 ‘온에어 프로젝트’, 뉴욕의 미술관 1층 로비에 석굴암 본존불을 모델로 한 얼음불상을 설치해 녹아 없어지는 과정을 통해 존재의 실체 없음을 보여준 ‘아이스 붓다’….

이 같은 일련의 작업을 통해 그는 세계적 사진작가로 올라섰다. 뉴욕의 국제사진센터(ICP)에서 아시아인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고, 빌 게이츠가 그의 사진 한 장을 1억원에 구입한 것으로도 유명해졌다. 세계 100대 사진가에 뽑히고, 2009년 제53회 베니스 비엔날레 초청으로 6개월간 특별전을 갖기도 했다.

‘자연 하다’는 그 후 10년의 결실이다. 김씨는 “길고 긴 순례의 끝에는 자연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캔버스가 자연과 관계 맺는 과정을 통해 무시로 떨어져 나가는 업(業)의 부스러기를 본다”며 “하얀 천이 자연과 교감하고 공명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 또한 그렇게 온전히 내려놓고 살기를 갈망한다”고 말했다.

여주=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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