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칼럼] 그날 법관에 대한 로망을 버렸다

입력 2020-05-07 17:57   수정 2020-05-08 00:15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박병대·고영한 전 법원행정처장에 대한 형사 절차가 1년4개월째 계속되고 있다. 필자는 박 전 처장과 사외이사를 함께한 인연으로 재판을 참관하고 있다. 직권남용 판단의 준거인 직무범위와 수행평가는 매니지먼트(management) 영역으로 경영학에서도 깊이 있게 다룬다. 공직사회에서 직무유기·직권남용 논란은 외환위기에 대한 책임을 다투면서 본격화됐고, 외환은행 매각과 관련해 변양호 전 재정경제부 금융정책국장 등에 대한 기소를 통해 확장됐다. 감사원은 이미 퇴직한 변 전 국장을 2006년 직권남용으로 검찰에 고발했고 구속과 집행정지를 반복하며 진행된 재판 결과 대법원은 무죄를 확정했다.

직권남용은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해 의무 없는 일을 시키거나 권리행사를 방해하는 것으로서 형식적으로는 일반 직무권한에 속하는 사항에 대한 자기 직권의 불법적 행사를 의미한다. 직무유기는 공무원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직무수행을 유기하는 것으로서 직무를 수행할 작위의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직무를 버린다는 인식 하에 이를 수행하지 않는 행태다. 직권남용·직무유기 범위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고발 사건의 불기소 처분에 대한 항의로 고발인이 검사와 검찰총장을 직권남용과 직무유기 혐의로 고발하는 해프닝도 빈번하다.

양승태 직권남용 혐의 중 상고법원 건은 행정부나 기업계에 유사 사례가 차고 넘치는 통상적 갈등이다. 상고법원은 대법원이 맡는 상고심 사건 중 단순 사건만을 별도로 처리하는 법원을 상정한 것으로, 2014년 12월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인 168인의 동의로 설치안이 의원입법으로 발의됐다. 19대 국회 임기가 종료되면 자동 폐기될 사항이라 법원행정처에서 전직 판사 출신인 서기호 정의당 비례대표 의원을 상대로 로비한 것이 혐의 내용이다. 상고심 심리지연은 악명이 높은데 이의 해소를 위한 대법원장과 법원행정처장의 직무수행을 직권남용죄로 처벌하겠다는 것이다.

가로축을 직권범위의 명확성, 세로축을 직무수행의 강도로 놓고 4분면으로 나누면 1분면과 3분면(일부)은 안전지대다. 직권이 분명한 업무의 적극적 수행은 논란 여지가 적으며 하위직 단순 업무는 대부분 이에 속한다. 3분면 안전지대는 직권여부가 불분명해 소극적으로 대처해도 책임 묻기가 어려운 영역이어서 복지부동(伏地不動)이 판친다. 직권이 불분명한 직무를 적극 수행하면 직권남용, 분명한 직권에 대한 소극적 직무수행은 직무유기 가능성이 높다. 직권남용의 회색지대에서 변양호 건(**)을 양승태 건(*)보다 직권남용 쪽에 가깝게 놓은 것은 외환은행 매각은 성공했고 상고법원 추진은 실패한 정황이 반영된 것이다. 정치적 대립이 심화할수록 직권남용 논쟁은 더욱 격화되고 증거가 될 업무일지와 컴퓨터 파일을 미리 없애는 진시황 시절 분서갱유(焚書坑儒) 분위기가 확산된다. 복지부동과 분서갱유 여파로 국정동력은 약화되고 국가 미래는 어두워진다.

교육 환경이 열악한 시골에서 자란 필자의 소년시절 꿈은 물리학자와 법관이었다. 물리학 관련 책은 퀴리부인 위인전이 전부였고 제대로 배울 선생님도 없었다. 대학 진학 당시 생계 걱정으로 진로가 보다 안정적인 경영학을 택했고 교수 정년을 맞았지만 소년 시절의 꿈은 늘 아쉬웠다. 대법원 판사와 대법원장을 합쳐 12년이나 재임한 원로 법관에 대한 형사재판을 지켜보면서 계속 서글펐는데 특히 폐암 수술로 일시 중단됐던 재판이 재개되던 날은 더욱 그랬다. 그날 법관에 대한 로망을 버렸다. 오늘 밤 꿈에는 마리 퀴리 부부를 만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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