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 더욱 멀어지는 시민사회운동 [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0-06-04 09:30   수정 2020-06-04 13:16


윤미향 전 정의기억연대 이사장(더불어민주당 의원)의 정치권 진출을 놓고 우희종 전 더불어시민당 대표가 최근 소셜네트워크에 올린 글이 화제다. "시민들이 국회의원들에게 매달리는 방식보다는 스스로 정치세력화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이다. 노무현 정부 때 청와대 국정홍보비서관을 지낸 노희경씨가 "왜 (시민)운동의 목표를 의회 진출로 삼으면 안되는지 궁금하다"고 거침없이 한 얘기도 인용했다. 우 전 대표는 시민이 주체가 돼야 하고, 정치를 멀리하는 태도부터 극복해야 한다고 썼다.

우 전 대표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발판으로 정치적 영향력을 쌓아 국회의원 배지를 단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는 윤 전 이사장을 옹호하기 위해 이런 주장을 펼친 것 같다. 그런데 '시민운동 출신의 정치권 진입 필요성'에 그치지 않고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까지 몇걸음을 앞서 달려나갔다. 최근의 시민사회운동이 과거에 비해 많이 위축되고 있는 가운데 '독자 정치세력화'란 화두를 꺼내들었다는 점이 놀랍기만 하다.

◆익숙한 듯, 익숙치 않은 '시민사회'

우 전 대표가 말한 '시민'은 '시민사회' 또는 '시민사회운동'을 가리키는 것 같다. 시민단체, 시민운동에 비해 조금은 낯선 '시민사회'는 본래 '국가'에 대별되는, 대척점에 있는 개념이다. 18세기 민족국가가 형성되고 자본주의적 경제질서가 하나둘 뿌리 내리며 국가체제의 동원과 규율, 규제와 간섭에 대항한 게 시민이고 시민사회였다. '자본가-노동자'라는 경제적 관계가 아니라 국가사회의 획일적인 규율과 통제를 거부하는 시민들의 결합과 저항이 시민사회의 형성으로 나타났다. 국가 대 시민사회, 거기에 경제적 관계를 중심으로 한 경제사회, 그리고 정치사회까지 여러 층을 쌓아 얘기할 수 있지만, 가장 기본 골격은 국가 대 시민이었다.

시민사회는 직접민주주의와 참여민주주의의 장점을 살려내는 통로로 작용하며 현대 대의민주주의의 결점을 보완할 수 있는 대안으로 여겨져 왔다. 법치와 민주주의 질서 안에서 국가권력과 자본의 힘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역할도 기대받았다. 형식적 민주주의의 제도적인 구축을 넘어 민주주의의 실질적 심화를 이뤄낼 수 있는 핵심 영역이 바로 시민사회라는 것이다.

◆'국가'와 한 몸 되면 존재이유 사라져

굴곡 많은 한국 정치사와 민주주의 역사에서 이런 시민사회의 기능은 더더욱 각광받았다. 1970~1980년대 재야 민주화 운동의 출발점이었던 '시민단체'나 '시민운동'이 1990년대 이후 경실련, 참여연대 등을 통해 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졌다. 1990년 태동한 정의기억연대의 전신인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도 그 중 하나였다.

하지만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며 국가가 이런 시민운동의 아젠다(의제)를 차츰 빼앗기 시작했다. 시민사회운동의 사회적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될 수 밖에 없었다. 노무현 정부 때 많은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이 정부나 의회 등으로 잇따라 진입한 것도 한 요인이다. 정부 정책을 비판, 견제하기 보다 정책 대행기구가 돼버린 듯 하다는 얘기까지 나왔다.

'국가-정당-시민단체' 간 선순환 구조도 찾아볼 수 없었다. 선진국에선 시민단체 출신이 정부나 입법부에서 활동한 뒤 다시 시민사회로 돌아와 그 축적된 경험을 돌려놓는 순환체계가 작동했다. 하지만 한국에선 이런 선례가 정착되지 못하고, 권력과 제도권의 단맛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인사들이 대부분이었다. 개인적인 정치 야심과 자기단체 보호를 목적으로 운동했다고 밖에 볼 수 없었다.

시민사회는 국가와 '한 몸'이 돼선 곤란하다. 자정 역할을 해야 할 시민사회가 급속히 국가의 기능과 동일시되고 편입돼버리기 때문이다. 건전한 비판과 견제는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시민사회가 놓쳐선 안될 과제다. 시민단체가 반대하는 세력이 정치권력을 잡았을 때는 비판, 견제하고, 같은 초록동색이면 급속히 한몸이 될바엔 그냥 처음부터 정치세력, 정당체제로 가면 된다. 시민사회단체일 필요가 없다. 처음부터 정당을 만들면 될 일이다.

◆바뀐 시대, 달라져야 할 시민운동

과거의 백화점식 시민운동으로는 다원화되고 복잡한 이해관계와 그 속에서 분출하는 욕구를 제대로 수용하기 어렵다는 전문가들 지적이다. 예전엔 정치개혁, 인권, 환경 등 큰 담론을 중심으로 활동했다면 이제는 사회적 약자, 소수자 배려, 경제적 양극화에 대응하는 활동, 국제개발협력 사업, 지역 주민조직들의 생활밀착형 운동에 대한 수요가 많아지고 있다. 초고령화, 노후불안, 은퇴절벽, 청년빈곤 등 시민사회가 접근해야 할 주제들도 다양해졌다.

사회구성원들의 관계와 조직의 원리도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디지털화, 개별화하고 있다. 2016~2017년 박근혜 대통령 반대를 중심으로 촛불집회의 기억이 아직 선명하지만, 동시에 여성 혐오 같은 특정 사안에 대해 온라인에서 의견을 결집하고 이를 공론의 장으로 끌어내는 모습들도 많아졌다. 시민운동이 하나의 오프라인 조직으로 일상적으로 움직여야 하는 조직을 갖출 필요도 없게 됐다.

하지만 지금의 한국 시민사회단체들은 이같은 변화를 따라가려 몸부림치기는커녕 이전의 투명성, 도덕성마저 정의연 사태를 맞으며 의심받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시민사회 단체들이 '회원 없는 시민단체' '시민 없는 시민단체'로 쪼그라든 이유다. 시민사회 운동이 위기에 처했다는 얘기가 공공연하다. 우 대표와 노씨가 '우리가 정치로 바로 진출하면 안되는 이유가 뭔데'라고 한 것은 이런 시민운동의 절박함에서 잘못, 그리고 불쑥 튀어나온 마음속 진심이 아니었을까.

원로 진보 사회학자인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지난 달말 한 토론회에서 정의연 사태와 관련, 이같이 말했다. "진보는 더는 시민사회를 대변했던 과거의 진보가 아니다. 국가권력을 중심으로 한 기득권 집단 또는 기성체제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다." 일부 시민단체들이 국가권력의 일부가 되거나 사회 기득권이 돼가고 있다고 했다. 이제는 이런 비판을 진지하게 성찰해야 할 시점이다. 독자 정치세력화를 얘기하기엔 시민과 너무 멀어져 가고 있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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