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 속 실탄 박힌 채 70년…학도병 참전 후회 없다" [한국전쟁 70주년]

입력 2020-06-19 09:45   수정 2020-06-19 15:43


19018.

6·25 참전 유공자 류재식씨(88·사진)가 1950년 11월에 부여받은 군번이다. 학도병으로 참전한 이후 2개월 동안 철모도, 군복도, 군화도 없이 교복을 입고서 최전선을 누빈 지 2개월만에 받은 군번이었다.

압록강을 눈앞에 두고 중공군에 밀려 후퇴하던 1950년 11월, 국군은 그에게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집에 가도 좋으니 더 이상 교복 입고 싸우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춘천중 5학년 3반 류재식 학생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도 스무살이니 전선에 남겠다"고 했다. 결국 그는 군번 없는 학도병에서 '19018 이등병 류재식'이 되어 인민군의 총을 맞을 때까지 싸웠다.

▷6·25가 터졌을 때 어디에 계셨나요.
"고향 춘천에서 학교 다니고 있었어요. 중학교 5학년 학생이었는데(당시 중학교는 6년제였다), 인민군이 내려와서 꼼짝 못하고 함락됐죠. 저하고 우리 가족은 민간인이니까 죽이진 않았는데, 인민군 지배가 아주 혹독했습니다."

▷어떤 점이 혹독했다는 말씀이신가요.
"얘들(북한)이 인민재판으로 사람을 많이 죽였어요. 우리 춘천시 온의동 이장도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었지…. 조금 돈이 있거나 동네 이장 이런 사람들 등짝엔 빨간 글씨로 '인민의 적'이라고 적힌 팻말을 붙인단 말야. 그리고선 곧장 인민재판을 열고 '인민의 고혈을 착취했다'는 누명을 씌우고 바로 처형시켜요. 우리 이장은 개울가에서 돌맞아 죽었어요."

▷주민들의 동요가 컸겠습니다.
"말도 못해요. 공출은 또 얼마나 심했는지…. 4·6제라고 해서 고추 10개를 수확하면 4개를 공출해갔는데, 품질 좋은 것으로만 4를 채우라 그래요. 그런데 그만큼 좋은 게 안 나온단 말야. 없으면 옆 마을에서 꿔서라도 줘야 했어요. 공산주의니 자본주의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도 여기에 학을 떼고 인민군에게 완전히 등을 돌렸어요."

▷할아버지께선 끝까지 참으셨나요?
"공출까지는 참을 수 있었는데, 인민군이 나보고 전쟁에 나가라고 했어요. 보나마나 낙동강 총알받이가 될 게 뻔한데 도저히 인민군으로 참전할 수는 없겠더라고. 그래서 친구들 3명이서 산 속으로 냅다 줄행랑을 쳤어요. 그때가 1950년 7월이었는데, 산 중턱에서 두 달 동안 숨어 지냈습니다. 어머니께서 몰래 산에 놓고 가시는 곡식을 먹으면서 버텼어요."

▷언제 국군 학도병으로 참전하신 건가요?
"1950년 9월 28일 서울이 수복될 때 춘천도 함께 수복됐어요. 우리 국군 6사단이 태극기 달고서 춘천에 들어오는 걸 산 위에서 보고는 '만세!' 부르면서 뛰어내려갔죠. 그리고 그날 바로 국군에 '나도 전쟁에 학도병으로 참전하겠다'고 말했어요. 산 속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던지…. 나라가 있어야 우리의 삶도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학도병에서 이등병 거쳐 장교 임관

학도병으로 전쟁에 합류한 류씨는 수색중대에 자원해 들어갔다. 수색중대는 적진 한 가운데에서 수색정찰 및 전투 임무를 수행한다. 류씨는 "조금 안전한 포병으로 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학도병으로서 어떤 전투에 참여했나요?
"많았죠. 화천 수력발전소 점령, 철원 노동당사 점령…. 셀 수도 없어요. 교복 입고 머리엔 철모 대신 교모(校帽) 얹은 채로 전투에 나갔어요. 군대가 나한테 군번도, 군복도 안 줬지만 M1 소총 하나는 줬어요. 그래도 자긍심이 있어서 압록강 바로 앞에 있는 만포까지 북진하면서 열심히 싸웠죠."

▷가장 기억에 남는 전투는 무엇인가요?
"전부 사람이 너무 많이 죽어서 원…. 화천 수력발전소 점령할 때 인민군 소속 소년병을 한명 생포했어요. 그 아이가 열 다섯 살이었는데, 그 당시엔 포로 후송이란 것도 제대로 없을 때였습니다. 전쟁터에 데리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우리 소대원이랑 주변에서 이 친구를 즉결 처분하려 하더라고. 내가 온 몸으로 감싸면서 막았죠. '나보다도 어린 학도병인데 절대 안 된다'고 무작정 막았어요. 나부터 쏘라 그랬어. 그래서 당시 우리 소대장한테 귀향증 받아내서 고향으로 돌려보냈어요. 사람 살린 게 가장 기억에 남네."

▷결국 압록강까지는 못 가셨겠어요.
"만포에 도착해서 내일이면 압록강 간다고 말하고 있었는데, 중공군이 들이닥쳤습니다.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죠. 그리고선 평안북도 구장이라는 곳에서 낙오한 군인들하고 같이 모였어요. '낙오자선'이라고도 부르는데, 쉽게 말해서 패잔병들 다시 헤쳐모이는 곳이에요. 그때 국군이 나보고 집에 갈지, 이등병으로 입대할지 선택하라고 했어요. 통일을 눈앞에 두고 후퇴했는데 이대로 돌아갈 수는 없어서 이등병으로 입대했죠."


▷계속 병사로 싸우신 건가요?
"1951년 6월이었나 7월이었나, 제가 상등병일 때 장교 시험을 보고 소위로 임관했습니다. 1년 만에 학도병에서 소위가 된 거죠. 그때 소위를 '소모품 소위'라고 했어요. 소위들이 소대장을 맡으니까 보통 앞장서 싸우는데, 임관 잉크도 마르기 전에 소모품처럼 사라진다고 해서 붙여진 말이에요. 저도 전방에 가자마자 손톱하고 발톱 깎아서 봉지에 담았습니다. 전초기지에선 죽으면 시체도 못 찾으니까 다들 그렇게 했어요."

▷전방에서 많은 동료를 잃으셨겠습니다.
"아이고, 내가 살아남은 게 기적이지…. 중위 달고 소대장 하던 시절에 친하게 지내던 하사가 한 명 있었어요. 보성중 5학년 다니다가 입대한 이수복 하사. 인민군하고 땅따먹기 식으로 고지전을 벌일 때였는데, 원래 이놈이 항상 내 좌측에서 경계를 보더니 그날따라 오른쪽에 와서 엎드리더라고. '그래라~'하고 경계를 서고 있는데 이 하사가 오른쪽 귀에 총 맞고 즉사했어요. 나 대신 죽은 거지…. 나중에 전쟁 끝나고 시체를 찾으려 하는데, 찾을 수가 있나…. 지금도 국립묘지에 이름만 있고 유해는 없어요."

◆"전장에 두고온 전우가 너무 많아…."

류씨는 현재 6·25 참전 유공자회 서울시지부장을 맡고 있다. 아직 생존해 있는 서울 지역 유공자 1만5000여 명을 대표하는 자리다. 그러나 류씨는 "진짜 유공자는 따로 있다"고 말했다.

▷유공자 아닌 유공자,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전쟁터엔 노무자(勞務者)라고 있어요. 총 들고 싸우는 군인이 아니라 우리 밥해주고 포탄 옮겨주는 분들이에요. 다들 우리 아버지 뻘이었는데, 이분들이 전쟁터에서 엄청 죽었어요. 전방에서 군인들은 참호 밑에 바짝 붙어 숨어있는데, 노무자 아저씨들은 포탄 옮기고 밥 옮기다가 저격병들한테 수시로 맞아 죽었습니다. 그런데 이분들이 국립묘지엔 못 들어가요…. 총만 안 들었다 뿐이지 실질적으로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신 분들인데…."

▷휴전을 앞두고서 전투가 치열했다고 들었습니다.
"아휴…. 고지 하나를 더 빼앗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1953년 7월 13일 화천 인근 금성지구에서 전투가 있었어요. 우리가 점령하고 있던 406고지가 요충지라, 중공군하고 인민군이 여길 빼앗으려고 갖고 있는 포탄을 엄청 쏟아부었어요. 곧 휴전한다고 하니까 이놈들이 아끼지 않고 있는대로 다 쏜거지. 정말 포탄이 우박처럼 쏟아지더라고. 우리 중대는 참호 안에서 포탄 그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나중에 나와 보니까 고지에 있던 중대원 170명 중에 내가 관할하는 소대원 7명 빼고 다 죽었어…. 시체가 정말 산처럼 쌓였지…. 그렇게 전멸될 때엔 흔히 '녹았다'라고도 표현해요."

▷살아남아서 어떻게 하셨나요?
"7명이서 뭘 할 수 있었겠어요. 포격 그치니까 중공군이 삽시간에 피리 불면서 우리가 있던 참호를 밟고 넘어갔습니다. 참호에서 발각은 안 됐지만 우리는 앞뒤로 갇힌 꼴이었죠. 남쪽으로 언덕 넘어서 도망쳐야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산을 올라타면 발각될 것 같았어요. 결국 산 밑으로 내려가서 강을 끼고 지그재그로 도망쳤습니다. 물길따라 도망치던 와중에 한번 발각돼서 연락병 한 명은 목구멍에 총을 맞았어요. 컥컥대면서 나보고 '소대장님 살려주세요'라고 하더라고…. 그런데 거기서 어떻게 시신을 챙기겠습니까…. 물길따라 흘러보냈죠…. 결국 6명이서 부대로 복귀했습니다."

◆목숨으로 지켜낸 땅

적진에서 겨우 탈출한 류씨는 중대장이 되어 다시 전장으로 나갔다. 지루한 고지전을 반복하던 그는 휴전을 1주일 앞둔 1953년 7월 20일, 총에 맞았다.

▷어떤 상황에서 총을 맞으신 건가요.
"그날도 406고지를 두고 전투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수류탄을 안고 정신없이 적진으로 달려가던 중에 상대방 지휘자하고 딱 마주치게 됐어요. 서로 곧장 들고 있는 총을 맞댔죠. 상대방 총은 내 어깨에 부딪치면서 발사되고, 나는 상대방 가슴에 대고 쐈어요. 상대방이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는데, 저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습니다."

▷총에 맞고도 살아남으신 게 다행입니다.
"그때는 죽는 줄 알았죠. 마산으로 후송돼서 수술을 받고 목숨은 건졌는데, 총알이 깊게 박혀서 꺼내지는 못했습니다. 총알이 어깨뼈에 부딪힌 다음에 가슴 안쪽으로 깊게 파고 들어갔더라고. 지금도 총알은 내 가슴에 박혀있어요. 비행기 수속 밟을 때마다 삑삑 거립니다. 가슴팍에 실탄 안고 산 지 70년이야."


류씨는 가슴 속 실탄이 보이는 엑스레이 사진을 보여주면서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30초쯤 시간이 흘렀을까. 그는 말했다.

"전쟁이라는 것은, 또 땅이라는 것은 목숨하고 바꾸는 거에요. 이땅은 수없는 생명하고 맞바꾼 땅이야. 어떻게 이 나라가 섰는지 우리 국민들이 꼭 기억해줬으면 해요. 6·25를 제대로 가르치지 않으면 제2의 6·25가 안 난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평화가 왔을 때 전쟁을 준비해야 미래의 평화를 이룰 수 있습니다."

병원에서 휴전을 맞은 중위 류재식은 직업군인이 되어 대령 계급장을 달고 1980년 전역했다. 학도병으로 나라를 위해 싸우기 시작한 지 30년째 되는 해였다.



정의진 기자 justji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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