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민족 자결' 외친 윌슨, 실제론 '아메리카 퍼스트' 원조

입력 2020-07-02 18:06   수정 2020-07-03 03:28


1차 세계대전(1914~1918)이 한창이던 1915년 크리스마스 아침, 영국 군수장관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글래스고 지역 노동조합원들을 만나 “전쟁을 지속하기 위해선 한 차례 더 신병을 모집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예견했다. “이 전쟁은 ‘대홍수(the Deluge)’와 같다. 사회와 산업구조에 전대미문의 변화를 가져올 대자연의 격변이자 바위와 같았던 유럽인들의 삶을 뒤흔드는 지진이다. 그 엄청난 혼란 속에서 국가들은 단숨에 몇 세대를 전진하거나 후퇴할 것이다.” 전쟁이 성경에 나오는 ‘대홍수’처럼 세계를 재편할 것이라는 종말론에 가까운 발언이었다.

그의 말대로 1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는 ‘대격변’했다. 1917년 볼셰비키의 정권 장악을 시작으로, 유라시아 옛 제국들과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호엔촐레른·합스부르크 왕국, 오스만 제국이 박살났다. 이어 승전국들이 패전국인 바이마르 공화국에 엄청난 양의 보상금을 요구하는 것을 골자로 한 베르사유 협정을 체결했고, 같은 시기 유럽과 중동에서 국민국가가 탄생했다. 동유럽에서 혁명과 반혁명이 이어졌고 러시아는 내전과 기근으로 흉흉했다. 중국에선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두 차례 국공 내전이 일어났고, 독일에선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의 세계를 밀도있게 서술한 《붕괴》(2019)로 국내에도 널리 알려진 영국 역사학자 애덤 투즈는 신작 《대격변(원제:the Deluge)》에서 1차 세계대전부터 대공황에 이르는 세계 질서의 재편 과정을 다룬다. 미국을 포함해 당시 8개 강국인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러시아 중국과 그들 간 전략적 행위를 추적한다.

투즈는 “1차 세계대전을 통해 국제사회에는 ‘부(不)의 존재(absent presence)’라는 새로운 질서가 출현했다”고 서술한다. 저자에 따르면 ‘부재하지만 존재하는 것’을 의미하는 ‘부의 존재’의 중심엔 미국이 있었다. 미국은 승자도 패자도 아니었지만 1차 세계대전 이후 절대 우위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전후 처리와 배상금 문제를 주도하며 세계 유일의 패권국으로 부상했다. 새로운 세계 질서가 재편되는 국면을 지배한 인물이 미국 28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이다. 윌슨은 미국의 우월한 경제력을 발판삼아 협상국과 동맹국에 ‘옳은’ 편의 승리가 아니라 어느 편도 승리하지 않는 것을 강요했다. 이 ‘승리 없는 평화’라는 구호는 ‘문호 개방’이라는 일관된 정책 목표와 함께 미국이 주도한 전후 질서를 규정하는 핵심 요소로 작용한다.

저자는 베르사유 협상, 워싱턴 해군 회담, 배상금 문제 처리 과정에서 보이는 미국의 일관된 패권 추구 양상을 집요하게 추적한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윌슨의 모습은 ‘민족 자결주의’ 주창자로 알려진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미국의 가치를 실현하는 현실주의자다.

‘부의 존재’라는 불안정한 기반으로 시작된 미국의 패권주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새로운 전쟁에 이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저자는 새로운 세계 질서가 어떻게 결합하고 어떻게 어긋나 또 다른 재앙에 이르게 됐는지 파고든다. 그는 “미국이 강력한 디플레이션 정책을 펼치며 다른 나라에 동일한 조치를 강요한 게 화근이었다”고 지적한다. 미국은 디플레이션 정책에 큰 희망을 걸었다. 재정적으로 압박을 받으면 정치적 불만을 잊은 채 시장 원리에 집중할 것이고, 그렇게 시장에 기반을 둔 자유주의가 군비 축소의 방편이 돼 결국 제국주의적 경쟁이 재발하는 것을 막아낼 수 있다고 기대했다. 특히 금본위제는 황금족쇄로 불리며 모든 나라의 통화 발권력을 금으로 묶어버렸다. 통화가치 안정을 통해 제국주의로 상징되는 군국주의자들의 발목을 묶겠다는 계산이었다.

이처럼 미국을 중심으로 협력과 연대를 모색한 세계 질서는 미국 대공황이라는 미증유의 사태에 휩쓸려 한순간에 파국을 맞는다. 저자는 “1929년 미국 증시가 붕괴하는 ‘블랙 먼데이’를 시작으로 벌어진 대공황은 1931년 영국이 금태환을 정지하며 금본위제에서 이탈하게 만들면서 다가올 두 번째 세계대전의 도화선이 됐다”고 주장한다. 같은 해 독일의 전후 배상금을 영구히 종결하는 미국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의 모라토리엄 선언이 미 의회에 가로막히면서 미국은 대공황 해결을 위해 ‘국가주의’(국가의 이익을 개인의 이익보다 우선하는 사상)로 회귀했다.

저자는 “당시 미국의 모습은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세계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지금의 미국과 닮아 있다”고 지적한다. 그는 “코로나19라는 대유행병과 이것이 낳은 경제위기로 또다시 인류는 대격변의 전조 앞에 서 있다”며 “1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이라는 20세기 최대 위기는 당시에는 부재했던 세계적 협력과 연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한다”고 강조한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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