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대통령 '디지털 뉴딜' 외쳤지만…IT업계 "방해만 말라"

입력 2020-07-04 07:00   수정 2020-07-04 14:14


미국 백악관과 보건복지부는 지난 5월 벤처 제약사 '플로'에 3억5400만달러(약 4300억원) 규모의 계약을 '안겨'줬다. 미 복지부가 민간업체와 맺은 단일 계약으로는 사상 최대 규모라 현지 언론은 '선물'이라는 표현까지 썼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미 백악관은 플로가 코로나19(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치료용 복제약(제네릭)과 의약품 원료를 미국 내에서 생산해야 한다고 했다. 플로가 이 약속을 지킨다면 계약 규모는 10년간 총액 기준 8억1200만달러(약 9700억원)까지 늘어난다.

미 뉴욕타임즈는 "의약품 생산과 공급망을 국내로 들여오게 하려는 미 정부의 노력"이라며 트럼프 정부를 이례적으로 칭찬했다. 임금 상승과 규제를 피해 다른 나라로 생산기지를 옮긴 자국 기업들을 다시 '유턴'시키는 조건으로 확실한 '당근'을 제시한 것이다.

우리나라 상황은 반대다. 중소기업중앙회가 지난달 26일 발표한 '중소기업 리쇼어링(해외진출 기업의 국내복귀) 관련 의견 조사'에 따르면 해외로 나간 국내 중소기업 10곳 중 9곳은 "국내로 복귀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이들이 국내로 생산기지를 다시 이전할 생각이 없는 이유로는 높은 생산비용(63.2%), 현지 내수시장 접근성(25.0%), 각종 규제(9.9%) 등을 꼽았다.

대기업도 마찬가지다. 전국경제인연합회가 코로나19 이후 국내 매출액 1000대 기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97%의 기업이 "해외공장을 한국으로 이전할 생각이 없다"고 답했다. 전 세계가 코로나19로 산업 공급망에 불안을 겪어 자국으로 돌아가려는 시도를 하는 상황에서 조차 국내 기업들은 '유턴' 생각이 없는 것이다.
"미국·일본, 기업 지원 쏟아내는데..."
세계 최고 수준의 인터넷 공급망, IT 인프라, 메모리 반도체 기술로 당당히 'IT 강국 자부심'을 내세웠던 대한민국이 코로나19 이후 '기로'에 설 수 있다는 평가가 나온다. 코로나 사태가 촉발한 급격한 변화로 국경이 닫히고 글로벌 산업 공급망이 불확실성에 휩싸이면서 '기반산업의 본국 회귀'의 중요성이 부각되고 있지만 정부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리쇼어링을 위해 확실한 감세와 보조금 지급, 환경 규제 완화 등으로 적극적인 유인책을 내놓고 있는 다른 나라와 달리 우리 정부가 '변죽'만 울리고 있어서다.


4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우리 정부가 기업들의 리쇼어링을 유인하는 '유턴법'을 시행한 2014년 이후 지난 5월까지 국내로 돌아온 대기업은 현대모비스 단 1곳에 불과했다. 현대모비스는 지난해 8월 울산에 친환경차부품 공장을 지었다. 유턴 기업이 가뭄에 콩 나듯 하자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해 9월 직접 이 공장 기공식에 방문하며 현대모비스를 치켜세웠다. 그러나 현대모비스 마저도 국내 경영환경에 매력을 느껴 돌아왔다기보다는 중국과 '사드' 갈등이 불거지면서 울며겨자먹기로 돌아왔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코로나19 상황 속에서도 국내 기업들이 해외 생산기지를 고집하는 이유는 '과도한 규제' 때문이다. 환경·노동 규제, 반기업·친노동 정책, 높은 법인세 부담 등이 이유다. 예컨대 지난해 일본 수출규제로 벼랑 끝에 섰던 반도체·디스플레이 업계에선 '화평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 문제가 됐다. 현행 화평법에 따르면 신규화학물질을 연간 100kg 이상 제조·수입할 경우 물질에 따라 최대 47개 시험자료를 첨부하도록 해 행정적·금전적 부담이 크다는 지적이다.

실제 지난해 일본이 한국을 상대로 수출규제를 걸었던 '플루오린 폴리이미드'의 경우 국내 2~3곳의 기업이 몇 년 전 개발을 완료했음에도 불구하고 화평법과 화관법(화학물질관리법) 때문에 양산을 포기했다. 중소기업이 아예 감당하기 어려운 행정적, 금전적 등록 규제로 상용화를 막고 있어서다.

반면 미국, 유럽, 일본 등 임금 수준이 높아 자국 기업들이 대부분 해외로 떠났던 각국 정부들은 높은 수준의 유인책을 내놓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해외투자 기업보다 자국 내 제조업을 우선 지원하는 '바이 아메리카(Buy America)' 행정명령에 서명했고, 미 의회에선 250억달러 규모의 '리쇼어링 펀드' 조성을 논의하고 있다. 일본은 아베 신조 총리가 리쇼어링 기업 지원에 20억달러를 내놓겠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임채성 건국대 기술경영학과 교수는 "단순히 보조금 확대 정도로 해외에 진출해 있는 국내 대기업을 다시 불러들이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며 "정부가 국내 산업에 의미 있는 정도의 리쇼어링을 원한다면 '공무원'의 관점이 아니라 '기업'의 관점에서 무엇이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고 말했다.
"지원은 못해주더라도 방해는 말아야"
규제는 신사업도 해외로 내몰고 있다. 네이버 일본 자회사 '라인'은 지난해 12월 일본에서 원격의료 사업을 시작했다. 국내에선 관련법(의료법)과 의료계의 벽에 부딪혀 한 발짝도 못 나가던 사업이다. 증상이 있는 환자가 비용을 지불하면 모바일 메신저 '라인'을 통해 의사와 상담할 수 있다. 한국에선 허용하지 않고 있다. 국내 의료법상 의사와 원격으로 진료행위를 하는 것은 불법이다.

원격의료를 포함한 헬스케어 사업은 국내에서 가장 시작하기 어려운 분야로 꼽힌다. 2016년 국회에서 원격의료 도입을 위한 의료법 개정안이 제출됐으나 처리되지 못했다. '대면진료'를 고집하는 의료계와 의료영리화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애플워치 등 심전도 측정 기능이 있는 스마트워치를 그동안 국내에서 사용할 수 없었던 것도 우리나라가 원격진료를 금지하고 있어서다.


규제 강화 시도는 현재 진행형이다. 정부와 국회는 문재인 대통령이 '디지털 뉴딜'을 발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민간이 운영하는 데이터센터(IDC)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는 방안을 추진해 논란을 키웠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과방위)는 지난 5월 전체회의를 열어 방송통신재난관리기본계획에 민간의 데이터센터를 포함하는 내용을 골자로 한 '방송통신발전 기본법' 개정안을 통과시켰다.

과기정통부는 논란을 의식한 듯 "데이터센터가 작동하지 않아 주요 데이터가 소실될 경우 기업과 소비자가 막대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며 "방송통신재난관리기본계획을 수립·시행하는 대상인 주요 방송통신사업자에 데이터센터를 운영하는 사업자를 포함해 방송통신 재난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IT업계는 크게 반발했다. 중요 시설이라는 이유만으로 정부가 민간이 설립하고 운영하는 시설을 자기 통제 아래 두는 것은 재산권을 침해할 소지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이중규제' 문제도 지적됐다. 데이터센터는 IT기업의 핵심 자산이다. 현재 정보통신망법에 따라 이용자 데이터 보호가 취해진다. 여기에 방송통신발전 기본법이 추가로 더해지는 셈이다. 이 같은 논란 끝에 데이터센터 규제법은 법제사법위에서 '보류'됐고 20대 국회 종료와 함께 자동 폐기됐다. 동료 의원들도 납득시키지 못했다는 평가다.

한 인터넷 기업 관계자는 "정부가 개당 수천억원의 비용이 드는 데이터센터를 예산 400억원으로 50개나 구축하겠다('디지털 뉴딜')고 한 것도 황당하지만 기업의 핵심자산을 통제하겠다는 법안이 발의됐을 땐 걱정이 됐다"며 "지원은 못해주더라도 방해는 하지 말아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게 현재 IT업계의 심정"이라고 토로했다.

노정동 한경닷컴 기자 dong2@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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