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근로자 주머니 터는 건 경제정의가 아니다 [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0-07-08 09:30  


근로자와 기업이 실업 등에 대비해 적립하는 고용보험기금이 올해 바닥을 드러낼 위기에 처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일자리를 잃은 근로자들에 대한 구직급여(실업급여) 지급이 대폭 늘어난 것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다만 정부가 각종 일자리 사업을 펼치면서 정부 일반회계가 아닌 고용기금에서 돈을 끌어다 쓴 점이 원인을 제공했다는 게 아쉽다.

전기요금에 0.37%씩 자동으로 붙는 부담금으로 조성된 전력산업기반기금도 탈원전 정책에 따른 한국수력원자력의 비용 보전에 쓰인다고 한다. 사회보험 성격의 고용기금과 전력산업의 공익적 목적에 쓰여야 할 전력기금이 원래의 조성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 용도로 지출되는 셈이다. 근로자와 소비자의 기여로 만들어진 기금이 정부의 '쌈짓돈'이 됐다는 비판이 그래서 나온다.
정부 '쌈짓돈' 전락한 고용·전력기금
쌈짓돈은 '적은 돈'을 뜻한다. 그러다보니 용도를 특정 짓지 않고 쉽게 꺼내 쓸 수 있는 돈, 또는 그렇게 쓰는 돈을 말한다. 고용기금의 경우 청년추가고용장려금. 모성보호급여 등 기금의 본래 목적과 관련이 적은 지출항목으로 돈이 많이 빠져나갔다. 청년고용장려금은 중소·중견기업이 청년 한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할 때 1인당 연 900만원씩 최대 3년간 지원한다. 고용기금에서 이 용도로 올해 9909억원 지출이 예정됐으나, 소진 속도가 워낙 빨라 지난 1차 추경에서 4000억원을 추가투입키로 했다. 이만하면 쌈짓돈 수준을 넘어섰다.

청년 고용을 늘리자는 취지이지만, 보험금을 낸 적 없는 청년들에게 지급한다는 점에서 고용기금이 아닌 정부 재정사업으로 진행하는 게 맞다는 지적이다. 출산휴가나 육아휴직 때 돈을 주는 모성보호급여(1조5400여억원 규모)도 고용기금에서 지급할 성격이 아니라는 의견이 많다. 3년 전만해도 10조가 넘던 고용기금이 순식간에 고갈돼 보험요율(현행 근로자·기업 각각 0.8%) 인상이 불가피해졌고, 빤한 월급쟁이 유리알 지갑이 더 얇아지게 생겼다.

전력기금은 한수원이 월성1호기 조기 폐쇄, 신규 원전 건설 백지화 등으로 많게는 7000억원대의 손실을 본 것을 보전해주는 것이다. 정부는 이를 위해 전기사업법 시행령 개정을 입법 예고하며 법적 근거까지 마련했다. 전력기금은 한전 민영화 이후의 공적인 사업을 이어가기 위해 적립해온 기금(5조원대 안팎)이어서 민영화 취소 이후 별도의 '꼬리표'가 달리진 않았다. 그러나 지금도 고스란히 소비자들이 낸 돈으로 조성되고 있어 이렇게 정책적 용도로 마구 써도 될 돈은 분명 아니다.
통제 안받고 쓰는 중독성이 문제
고용기금과 전력기금 문제의 핵심은 일반회계 예산으로 진행해야 할 정부 재정투입사업에 기금의 재원을 끌어다 쓴다는 점이다. 이번 3차 추경에서 고용기금 보전 용도의 예산(4조6740억원)이 잡힌 데서 알 수 있듯이 정부로서는 일단 급한 불은 기금으로 끄고 추경 등으로 돌려막는 식을 택했다. 국회의 정부 재정 통제를 사전 예산심의를 건너띄고 사후적으로 받는 것이나 다름 없다.

일단 쓰고 난 뒤 기금의 정상적 유지를 위해 예산 지원이 필요하다고 하면 국회가 사후적으로 꼼꼼히 살필 수 있을까. 혹시 그 과정에서 국회가 정부 측에 모종의 댓가를 요구하고 속된 말로 '바터'하려 들 개연성은 충분하다. 더군다나 이번 3차 추경서 잡은 보전 예산 중 3조1000억원은 공공자금관리기금에서 빌려오는 돈이어서 나중에 이자를 붙여 갚아야 한다.

기금을 동원한 정부 사업은 또 국가재정의 건전성이란 측면에서 문제를 안고 있다. 재정투입사업을 줄이면 적자재정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감소하고 국가채무비율을 낮추는 효과가 있을 게다. 정부로서도 관행처럼 이어온 기금 동원 사업을 일종의 개혁이랍시고 뜯어고쳤다가는 재정건전성 수치 목표에 빨간 불이 켜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통제 받지 않고 손쉽게 은행 ATM처럼 뽑아 쓸 수 있는 기금 사업은 그 중독성 때문에라도 기약없이 지속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전력기금은 더더욱 탈원전에 따른 추가 손실을 메우는 일종의 댐 역할을 할 것이란 의심도 받고 있다. 신한울 3·4호기 건설이 최종 종결될 경우 관련 매몰비용에 따른 손실 또한 전력기금으로 막으려 할 것이란 관측이 나온다. 전기사업법에 산업부 장관이 전력기금이 축소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적시돼 있고, 감사원도 지난해 "여유자금이 과도하게 누적되는 전력기금 부담금 요율을 적정 수준으로 낮추라"고 산업부에 통보했다. 하지만 산업부는 꿈쩍 않는 모양새다.

목적 외 사업에 기금을 지출하는 것은 물론, 어떤 목적이라도 갖다 붙일 수 있는 기금이 존속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결국은 소비자, 근로자 등 국민 호주머니를 터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재벌을 두드려 잡는 것만이 경제정의 실현이 아니다. 이렇게 눈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정부 사업과 기금 빼먹기를 중단시키는 게 경제정의를 바로 세우는 또다른 방법이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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