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도 마신다' 커피병에 새겨진 詩와 그림의 비밀

입력 2020-07-09 10:00   수정 2020-07-09 10:06



출판사 창비는 계간지 ‘창작과 비평’을 펴낸다. 연회비 4만8000원을 내면 1년에 4번 계간지를 보내주고 단행본 책도 덤으로 준다. 기자도 3년 전 정기구독 회원이었다. ‘책을 사랑하는 사람이어서’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나 이 정도 책 읽는 사람이야’라고 폼을 잡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3개월에 한 번씩 배달오는 책은 결국 펼쳐보지도 못한 채 책장으로 직행했다. 결국 허세남이 되기를 포기하고 구독을 중단했다. 그렇게 창비는 창피한 기억으로 남았다.

창비를 다시 만난 것은 편의점이었다. 지난 2월부터 세븐일레븐에서 독점 판매하고 있는 빙그레 커피음료 아카페라의 ‘감성 아메리카노’ 였다. 페트병 커피 겉면에 쓰인 시(詩) 한구절이 눈을 사로잡았다.

‘온 힘을 다해 살아내지 않기로 했다/꽃이 지는 것을 보고 알았다/기절하지 않으려고 눈동자를 깜빡였다/한 번으로 부족해 두 번 깜빡였다/너는 긴 인생을 틀린 맞춤법으로 살았고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니었다/이 삶이 시계라면 나는 바늘을 부러뜨릴 테다’

이제니 시인이 창비를 통해 2010년 출간한 시집 ?아마도 아프리카?에 수록된 시 ‘밤의 공벌레’였다.

창비의 시집은 어떻게 커피 페트병으로 간 걸까. 사연은 이렇다. 세븐일레븐은 편의점 커피의 제품 디자인을 남들과 다르게 해보자고 했다. “서울 광화문 세종로 사거리 교보생명 빌딩 외벽 ‘광화문 글판’ 에 사람들의 발길을 잠시 멈추는 것처럼, 삶의 위로가 되는 글을 커피 겉면에 새긴다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3개월에 한 번씩 국내 최고의 명사들이 모여 ‘문안선정위원회' 회의를 열고 머리를 짜내는 광화문 글판의 수준을 편의점사 자체 기획력으로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래서 찾아간 곳이 출판사 창비. 문학 작품의 대중화를 시도하던 창비에게도 마다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창비는 지친 이들에게 위로의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문학 작품을 엄선해 내줬다.

긴 글귀를 새기려면 대용량 페트병 음료가 적당했다. '아카페라'를 앞세워 페트병 커피 시장을 점령한 빙그레에게도협업을 제안했다. 출판사, 편의점, 식품제조사. 그렇게 3자가 머리를 맞대 '감성음료'를 출시했다. 아메리카노와 함께 출시한 ‘감성 밀크티’에는 황정은 작가의 대산문학상 소설부문 수상작 <계속해보겠습니다> 의 글귀가 실렸다. 빙그레에 따르면 감성음료는 월 평균 5000만원어치가 꾸준히 팔려 나가고 있다.



편의점 CU는 국내 신진 작가들과 손을 잡았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미술 전시회가 대폭 축소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청년작가를 돕기 위해 이들을 지원하는 사회적기업 ‘88후드’와 협업했다. 22명의 작품을 파우치 커피와 음료 ‘델라페 아이스드링크’에 새겼다.



세븐일레븐이 배달앱 배달의민족과 협업한 커피 제품도 눈길을 끈다. 배민은 ‘B급 감성’을 내세우며 재미있는 문구를 쏟아내는 '네이밍 천재'로 불린다. 예를 들면 공산품을 판매하는 자사 온라인몰 '배민문방구'에는 연필 디자인에 '흑심있어요', 때타올에 '다 때가 있다', 쇼핑백에 '뭘 이런걸 다 드립니다' 등 기발한 문구를 넣은 제품을 판매한다.

배민이 세븐일레븐의 요청으로 컵커피에 써놓은 문구는 ‘주문하신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였다. ‘배달’과 ‘커피’가 주는 느낌을 직관적으로 뒤섞어 버려 재미를 극대화했다.

편의점을 점령한 커피는 이제 시인과 작가들의 원고지로, 예술가들의 캔버스, 카피라이터의 놀이터로 거듭나고 있다.

jp@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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