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 행정가'로 불리기 원했던 박원순 시장…결국 숨진채 발견

입력 2020-07-10 01:13   수정 2020-07-10 01:18


고(故) 박원순 서울시장은 '혁신 행정가'이자 사회의 밑그림을 다시 그리는 '소셜 디자이너'로 불렸다. 광화문 광장에서 벼농사를 짓기도 했고, 서울의 동서남북을 자전거 도로로 잇겠다는 꿈도 꿨다. 기존의 정치인들과는 전혀 다른 문법과 행동으로 국민들에게 다가가 신선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박 시장은 1956년 경남 창녕에서 2남 5녀의 7남매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1975년 서울대 사회계열에 합격했다. 하지만 입학 석 달 만에 박정희 정권의 긴급조치 9호를 반대하는 교내 시위에 참여했다 투옥된 뒤 학교에서 제명됐다. 이후 단국대 사학과에 입학해 1980년 사법시험 22회에 합격했다. 대구지검에서 검사로도 근무했지만 1년 만에 법복을 벗은 그는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인권변호사로는 권인숙 성고문 사건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등 수많은 시국사건을 맡았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민변)의 시작에도 참여했다.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알리던 그는 1991년 돌연 영국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 생활을 마친 박 시장은 시민운동에 뛰어들었다. 1994년 참여연대를 만든 것이 시작이었다. 그는 참여연대 시절 1인 시위라는 새로운 시위문화를 만들고,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국회의원 낙천·낙선 운동을 주도했다.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2000년에는 참여연대를 떠나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만들었다. 2006년에는 희망제작소를 창립했다.

‘시민운동의 아이콘’이었던 박 시장은 2011년 혜성처럼 정치판에 등장했다. 당시 오세훈 전 서울시장이 무상급식 주민투표 결과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자 그는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백두대간 종주를 마치고 내려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채 기자회견장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아직도 회자될 정도다. 2011년 나경원 전 미래통합당 의원을 꺾고 35대 서울시장에 당선된 그는 2014년·2018년 지방선거에서 내리 3선에 성공했다. 역대 서울시장 중 3선에 성공한 사람은 박 시장이 처음이다.

시장으로서는 모바일 간편결제서비스 제로페이와 공유자전거 따릉이를 도입했다. 서울로 7017도 그의 작품이다. 박 시장은 여권의 유력 대선 후보로 꼽혀오기도 했다.

박 시장은 지난 9일 공관을 나와 연락이 두절된 후 10일 오전 0시께 북악산 숙정문 인근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박종관 기자 pj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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