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집마련 꿈 걷어차인 3040의 '이유 있는 분노'

입력 2020-07-17 17:37   수정 2020-07-18 02:30


기자 또래인 30대 후반 직장인끼리 모이면 부동산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유주택자와 무주택자의 희비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아내의 반대를 무릅쓰고 4년 전 ‘영끌 대출’로 서울 아파트를 마련한 친구 녀석은 요즘 큰소리 떵떵 치며 산다고 한다. 정신없이 일만 하느라, 혹은 종잣돈을 못 모아서, 내 집 장만을 미뤘던 친구들은 “타이밍을 놓쳤다”며 전전긍긍하고 있다.

국토교통부 통계를 보면 지난해 생애 최초 주택 마련의 평균 연령은 39.1세. 2010년(38.4세)과 큰 차이가 없다. 하지만 30대 후반에 내 집 마련 자금을 조달하기는 10년 전과 비교해 너무나 버거워졌다.
실수요자 울리는 LTV·DTI

지난달 서울 아파트의 평균 매매가격은 9억2509만원(국민은행 집계). 금수저가 아닌 이상 대출을 낄 수밖에 없는데, 담보인정비율(LTV·집값 대비 대출한도)과 총부채상환비율(DTI·연소득 대비 원리금상환액의 비율)로 대표되는 대출 규제가 가장 큰 걸림돌이다. LTV는 2002년, DTI는 2005년 도입됐다.

LTV와 DTI가 본래 취지와 달리 엉뚱한 용도로 활용됐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 둘은 엄밀히 말하면 부동산 규제가 아니라 은행 건전성 규제다. 금융당국의 감독규정 등은 LTV·DTI를 ‘금융회사의 경영 건전성 유지’를 위한 관리지표로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론 집값을 잡는 데 쓰였다. 주택 구매 수요를 조절하는 강력한 효과가 입증되면서 부동산 대책에 단골로 동원됐다. LTV만으론 부족할 수 있고, DTI가 추가되면 매우 강력한 대출 억제 효과를 낸다는 연구 결과가 많이 나와 있다. 금융당국의 한 관료는 “노무현 정부 시절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잡히지 않던 수요가 LTV·DTI 동시 시행 이후 잡혔다”며 “청와대에서 ‘왜 진작 이렇게 안 했느냐’고 타박도 받았다”고 했다.

현재 서울 전역과 수도권 상당수 지역(투기과열지구)에 적용하는 대출 규제는 ‘역대급’으로 세다. 무주택자를 기준으로 LTV와 DTI가 각각 40%에 불과하다. 15억원 넘는 아파트는 ‘LTV 0%’(대출 금지)라는 사상 초유의 규제도 생겨났다.
“흙수저 직장인에게 가혹한 규제”
금융학자 중에는 이 제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도 많다. 2008년 금융위기 때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대표적이다. 미국이 서브프라임 모기지(비우량 주택담보대출) 부실로 무너졌지만, 한국은 LTV·DTI 규제 덕에 대형 시스템 리스크를 면했다는 것이다.

반면 “빚을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의 주택 구매 기회까지 빼앗는 과도한 규제”라는 비판도 끊이지 않았다. 풀었다 조이기를 거듭하는 과정에서 주택시장의 가격 변동성을 오히려 키웠다는 지적도 있다. 이명박·박근혜 정부 때는 LTV와 DTI 상한선을 풀어 경기 부양 효과를 노리기도 했다. 현 정부 들어서는 다시 규제를 꽉꽉 조이는 등 냉탕과 온탕을 오가고 있다.

해외에도 LTV와 DTI를 활용하는 나라는 많다. 다만 상한선이 국내보다 높은 편이고 ‘사다리 걷어차기’ 같은 논란은 찾아보기 힘들다. 미국의 LTV는 최대 80%이고, 홍콩은 집값에 따라 80~90%로 정해져 있다. 싱가포르는 1주택자에게 75%, 2주택자에게 45%로 차등 적용한다. 전통적으로 주택담보대출 시장이 발달한 유럽에서도 대출한도에 대한 직접 규제가 강하지 않다. 네덜란드의 LTV는 100%, 스웨덴과 노르웨이는 각각 85%다. 금융 선진국의 은행들은 대출 심사 과정에서 주택 담보가치뿐 아니라 이용자의 상환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하는 관행이 정착돼 있다.

정부는 ‘실수요자’에 한해 LTV와 DTI를 10%포인트 올려준다. 하지만 첫 집을 장만하려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이 되진 않는다. 맞벌이 부부는 소득 기준(부부 합산 8000만원)에 걸려 실수요자로 인정받지 못하는 사례가 많다. 물려받을 재산은 없어도, 열심히 공부해 좋은 직장을 얻고 가정을 꾸린 ‘자수성가형 샐러리맨’들이 손해를 보는 구조다.
‘2주택 장관’이 문제가 아니라…
일단 작은 집에서 출발하고, 전세 낀 아파트를 마련한 뒤 돈을 모아 이사하고, 아이가 자라면 평수를 넓혀가는 것. 베이비부머와 586세대의 전형적인 코스다. 하지만 지금의 30대는 그때와 다른 환경을 살고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취업, 결혼, 출산부터 늦고 저성장·저금리 시대에 자산 증식의 기회도 풍부하지 않다.

“사회적 성공을 누구보다 갈망하고, 노력에 걸맞은 합당한 보상을 중시하는 사람들.” 이른바 ‘밀레니얼 세대’의 특성에 대한 전문가 분석에 공통적으로 언급되는 내용이다. “열심히 일해 갚겠다는데, 왜 우리만 막느냐”는 30대 무주택자의 분노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집을 두 채 가진 장관이 한 채를 파느냐 마느냐는 이들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 때는 눈을 낮춰 형편에 맞게 시작했다”는 조언도 필요하지 않다.

강남 집값 잡으려다 수도권 전체가 요동치고, 매매가 잡으려다 전세가가 들썩이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투기꾼을 쫓는다는데 고통은 왜 실수요자의 몫이 됐나. 집값이 더 오를까 봐 부랴부랴 산다는 뜻의 ‘패닉 바잉(panic buying)’이 괜히 생긴 유행어가 아니다.
평범한 샐러리맨 위한 정책을 원한다
현 정부 분위기에서 “실수요자는 LTV·DTI 규제를 완화하라”는 요구가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 청년층의 주거 부담을 덜어주겠다며 추가한 정책이 ‘1억5000만원 이하 주택 구매 시 취득세 면제’인 걸 보면 공감능력도 갈 길이 먼 것 같다.

주택시장을 안정시키겠다는 정부 의지를 의심하진 않는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 ‘전형적인 실수요자’인 39.1세 무주택 직장인의 관점에서 정책을 한 번 되돌아봤으면 좋겠다. 이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좋은 집을 많이 공급해 가격을 안정시켜 주고, 실거주 의사와 상환 능력이 검증된 사람에겐 기회를 충분히 열어달라는 것이다.

tardi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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