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태릉에 갈빗집 넘쳤던 이유

입력 2020-07-22 18:11   수정 2020-07-23 00:24

서울의 새 택지 후보로 거론되는 태릉골프장은 노원구 공릉동에 있다. 공릉동은 원래 경기도에 속했다가 1963년 서울시로 편입될 때 공덕리의 공(孔), 태릉(泰陵·문정왕후)·강릉(康陵·명종)이 있는 능골의 능(陵)자를 따 지은 이름이다. 인근 신주막마을도 두 능을 조성하던 인부와 관리들이 드나들면서 생겼다.

지금의 태릉선수촌 자리인 묘동마을은 무덤이 많은 묘산(廟山)과 태릉·강릉의 능제(陵祭)를 준비하던 곳이 있어서 그렇게 불렸다. 왕의 장례나 제사에 쓰는 궁중 요리법은 이곳을 통해 민간으로 전래됐다. 왕릉 옆에 살면서 귀한 고기 맛을 본 사람들이 알음알음 갈비 요리법을 익혔다. 여기에서 ‘태릉갈비’가 시작됐다. 다른 왕릉 근처의 ‘홍릉갈비’ ‘삼릉갈비’도 이렇게 탄생했다.

태릉에 갈비촌이 집단으로 형성된 것은 1970년대 초였다. 인근의 먹골(묵동)에는 배나무가 많았다. 봄이면 흰 배꽃이 만발했다. 꽃놀이꾼들이 몰려들자 배꽃 그늘 아래에서 갈비를 구워 파는 사람들이 늘었다. 1972년 푸른동산이라는 놀이공원이 생긴 뒤로는 갈빗집이 더 늘어났다. 갈빗집이 돈을 많이 벌자 쌀장사, 연탄장사 하던 사람들이 너도나도 갈빗집을 차렸다.

처음에는 소갈비와 돼지갈비를 다 팔았지만 서민들이 주로 찾은 것은 돼지갈비였다. 돼지고기에 먹골배를 갈아 넣은 양념맛이 더해지면서 갈비촌은 불야성을 이뤘다. 1980년대 이곳을 찾았을 때, 지글거리는 숯불갈비 위로 내려앉던 배꽃 풍경이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 집 주방장이 “배즙뿐만 아니라 고기를 구운 뒤에도 마르지 않는 특유의 양념이 맛의 비결”이라며 자랑하던 모습도 생각난다.

그렇게 한 세대를 풍미한 태릉 갈비촌은 도시개발 바람에 밀려 불암동과 남양주 별내 쪽으로 하나둘 이전했다. 지금 태릉입구역과 화랑대역 주변에는 갈빗집이 거의 없다. 끝없이 펼쳐졌던 배밭과 먹골배의 추억도 갈비 굽던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한때 꽃놀이 인파와 소풍 나온 아이들의 재잘거림으로 왁자했던 갈비촌 너머로 드넓은 태릉골프장과 선수촌의 녹지가 보인다. 이곳도 머잖아 거대한 아파트촌으로 바뀔 예정이다. 그나저나 정부가 그린벨트를 살리는 대신 이곳 골프장 주변을 택지로 개발한다는데, 이곳 역시 그린벨트 지역이니 이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할까.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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