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계, 파업 앞서 치열한 내부 토론부터 해보라 [여기는 논설실]

입력 2020-08-13 09:00   수정 2020-08-13 10:21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가 일어나기 이전에도 우리 국민이 상대적으로 가장 높은 신뢰를 나타낸 기관은 의료기관이었다. 한국행정연구원이 실시한 ‘2019년 사회통합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민의 의료기관에 대한 신뢰도는 최하위인 국회는 물론이고 검찰, 경찰, 언론사, 중앙부처, 시민단체, 군대, 지방자치단체, 금융기관, 교육기관을 앞선다. 국민이 의료기관을 행태가 뻔한 이익단체의 하나로 여기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대한의사협회(의협) 스스로도 과거 외부에 의뢰한 공중보건 관련 정보원에 대한 신뢰도 분석을 통해 우리 국민은 대학교수(전문가집단), 의료인, 대한의사협회를 보건복지부 등 중앙정부와 국회보다 더 신뢰한다고 자랑한 적이 있다.

의협이 내세우는 비전은 ‘100세 건강시대를 여는 믿음직한 전문인’이다. 또 ‘우리는 인간 생명의 존엄과 건강한 삶의 가치를 존중하는 전문인으로서 지식과 양심에 따라 국민 건강의 수호와 질병치료에 최선을 다한다’를 미션으로 내세우고 있다. 전문인, 전문가 단체로서의 강한 자부심, 자긍심의 표출이다.

이런 의협이 지난 1일 ‘독단적인 의료 4대악() 철폐를 위한 대정부 요구사항’을 내놨다. 핵심은 1) 졸속 의대 정원 확대 계획 즉각 철회, 2) 공공의료대학 설립 계획 철회, 3) 한방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 철회 4) 비대면진료(원격의료) 육성책 즉각 중단 등이다. 의협은 12일 정오까지 대정부 요구사항에 대해 책임있는 개선의 조치가 없다면 14일 제1차 전국 총파업을 단행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어 12일 의협은 보건복지부 김강립 차관이 “의대 정원 확대 방침에 변화가 없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며 14일 전국의사총파업을 예정대로 단행하겠다고 밝혔다. 최대집 의협 회장은 페이스북을 통해 이번 파업 투쟁으로 의료기관 한 곳이라도 업무정지 처분을 당할 경우 회원들의 의사 면허증을 청와대 앞에서 모두 불태우고 전 회원이 업무를 중단할 것이라고 경고해 국민을 놀라게 했다.

다른 어떤 기관보다 의료기관을 신뢰한다는 국민이 이런 일련의 과정을 바라보는 심정은 혼란스럽고 착잡할 게 분명하다. 전문가 단체나 거대노조의 행태가 다를 게 없다고 실망하는 국민도 있을 것이고, 의협이 4대악으로 규정한 것이 왜 악인지, 그게 총파업의 명분이 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는 국민도 있을 것이다.

정부는 코로나19 사태 대응 과정에서 보건의료시스템의 우수성을 자랑하지만 의료정책의 문제점이 많다는 것은 국민도 잘 안다. 건강보험 재정의 지속가능성, 의료전달 및 의료수가체계 등 구조적인 문제는 코로나19 전이나 지금이나 그대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협이 전문가 단체라면 파업의 명분으로 내건 4대악에 대해 의료 소비자이자 건강보험 재정을 떠받치는 납세자인 국민이 납득할 논리를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관점에 서면 늘 제기되는 것이 의료계가 얼마나 치열한 내부토론을 했느냐는 의문이다. 의협이 규정한 4대악에 대해 다른 곳도 아닌 의료계 내부에서 의견이 극명하게 엇갈리는 모습을 보면 특히 그렇다.

의대 정원과 공공의대 설립 문제부터 의협과, 또 하나의 의료계 대표단체로 전체 의사 가운데 60%에 이르는 약 6만명이 소속 병원에서 일한다는 대한병원협회(병협)의 입장은 정반대다. 의협은 의대 증원은 의사 수 증가로 인한 의료비 상승과 인구 감소, 의학 교육의 중요성을 고려하지 않은 졸속이고, 공공의대는 막대한 세금을 들여 또 하나의 거대한 비효율을 만드는 불공정의 산실이 될 것이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병협은 의료수요 변화와 의사 공급을 추계한 ‘의사인력 적정성 연구’중간 결과를 근거로 “정부의 400명 의대 입학정원 증원은 의료현장에서 수급 부족 문제를 개선하는데 충분치는 않지만, 이제라도 의료현장의 고충을 헤아려 의대 입학정원 증원계획 방향성을 제시한 것은 다행”이라고 주장한다.

병협의 연구결과는 의대 입학정원을 최소 500명 증원시 2065년에 의사 수급이 적정 시점에 도달하고, 1500명 증원시 2050년에야 적정하게 된다는 추계결과를 제시하고 있다. 이어 환자 안전과 양질의 의료서비스 제공을 위해 의료인의 확보는 우선시돼야 하며, 병원이 의사 및 간호사 같은 필수의료인력을 구하지 못해 환자안전이 위협되지 않도록 개선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한다. 더불어 의사가 잘 교육되고 지역 및 감염 등 특정 분야에 적정하게 배치될 수 있는 방안 마련도 촉구하고 있다.

한방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도 마찬가지다. 의협은 건강보험 급여화의 원칙인 안전성, 효능성, 효율성이 담보된 필수의료 급여화 우선 원칙을 위반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한방 첩약 급여화 시범사업의 원인인 한의약정책관실과 한의약육성법을 폐지하라고 요구한다. 하지만 또 다른 전문가 단체인 대한한의사협회는 “첩약 건강보험 급여화 시범사업은 국민의 건강증진과 진료권 확대, 경제적 부담 완화를 위해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사업”이라고 주장한다.

국민이 가장 궁금해하는, 원격의료로 불리는 비대면진료가 왜 악인지도 예외가 아니다. 당장 고령 만성질환자, 산간벽지 등의 의료수요자부터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이 역시 의료계 내부에서 의견이 엇갈린다. 의협은 기획재정부, 산업통상자원부, 중소벤처기업부 주도의 비대면진료 육성책은 의료를 도구로 삼아 기업적 영리를 추구하려는 산업계의 요구를 수용한 잘못된 정책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병협의 관점은 다르다. 의사와 환자간 비대면진료가 국내에서 법으로 금지돼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에서 산업부의 산업융합 규제특례심의위원회가 재외국민에게 비대면진료를 임시 허가하자 병협은 향후 비대면진료의 제도화에 참고가 될 수 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한다는 입장을 내놨다. 선진국도 허용하고, 재외국민도 받을 수 있는 비대면진료가 왜 국내에서는 악인지 국민은 의아해할 수밖에 없다.

의협 홈페이지는 지금 거대노조와 다를 바 없는 대정부 투쟁판을 방불케 한다. 의협이 그저그런 이익단체의 하나일 뿐이거나 무조건 반대만 하는 단체였다면 국민이 높은 신뢰를 보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의협도, 병협도, 한의협도 전문가 단체다. 자기 주장만 있고 토론이 없다면 제대로 된 전문가 단체일 수 없다. 의료계가 치열한 내부 토론으로 전문가 단체의 품격을 보여줄 수는 없는가.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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