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일 남은 화관법…1만 中企 "대책 없다"

입력 2020-08-14 17:15   수정 2020-09-29 17:03


“범죄자가 될 바에는 차라리 문을 닫는 게 낫습니다.”

인천 남동공단에서 표면처리(도금) 공장을 운영하는 김모 사장은 20년간 일궈온 사업을 접기로 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여파로 일감이 급감한 와중에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 단속을 피할 수 없어서다. “업계 전체가 탈법자가 되느냐, 폐업을 하느냐의 갈림길에 섰다”는 게 그의 토로다.

국내에서 화학물질을 다루는 1만4000여 개 업체 대표들이 대거 ‘범법자’로 내몰릴 위기에 처했다. 화관법 위반 기업의 처벌 유예가 오는 9월 말로 끝나 10월부터는 현장 단속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화관법은 유해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기업이 취급시설 구축 등 조건을 충족해 허가를 받도록 규정하고 있다. 대상 기업은 내진설계, 경보장치 등 413개에 달하는 시설 기준을 맞춰야 한다. 기업들은 공장을 전면 개조해야 하지만 통상 수억원이 들어가는 비용 탓에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다. 화관법을 어기면 대표이사는 최고 5년 이하 징역 또는 1억원 이하 벌금을 맞는다.

업계에선 “관련 사업자를 모두 범죄자로 만드는 법”이라고 성토한다. 도금업체 모임인 한국표면처리공업협동조합이 최근 325개 회원사를 상대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96%인 310여 개 업체가 현행 화관법 요건을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화관법의 직격탄을 맞는 도금과 염료·안료 업종 등 정밀화학기술은 자동차 선박 반도체 등 한국 주력 산업을 비롯해 의류 건축자재 가전제품 등에 폭넓게 적용되고 있다. 이상오 한국표면처리공업협동조합 전무는 “화관법 때문에 중소업체들이 줄줄이 문을 닫으면 자동차 조선 반도체 등 전 산업 영역에 걸쳐 파장이 일 것”이라고 말했다. 곽노성 한양대 특임교수는 “중소 화학업체들이 사업을 접을 위기에 직면했는데 정부는 강행 의지만 고수하고 있다”며 “한국 주력 산업과 연결된 공급망의 가장 밑단이 끊어지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우려했다.
유예기간 끝나 10월부터 처벌
화관법 피하려 '무허가 영업' 우후죽순…"10월부터 범법자 될 판"
충북 지역에선 환경당국에 신고하지 않고 무허가 영업을 하는 화학공장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오는 10월부터 처벌이 본격화되는 ‘화학물질관리법(화관법)’을 피하기 위해서다. 반면 정상적인 영업을 하던 업체들은 문을 닫는 추세다. 인천에선 최근 표면처리(도금)업체 10여 개가 줄줄이 폐업했다. 인천 남동공단에도 곳곳에 불이 꺼진 정밀화학공장이 늘어나고 있다. 경기 시화공단의 한 중소 화학업체 대표는 “불황으로 망하든, 단속으로 망하든 선택지는 결국 폐업뿐”이라며 고개를 저었다.

“지킬 영세 업체 거의 없어…존폐 기로”
‘내진설계 유무, 배관의 재료와 두께, 환기구 설치 높이, 급기구 크기, 조명 설치 시 조도(lux), 탱크 간 간격, 방지턱 높이….’

환경당국이 유해물질 취급 공장에 대한 현장 점검 때 화관법에 따라 적용하는 기준이다. 항목별로 지켜야 할 구체적인 수치가 깨알같이 적시돼 있다. 한 화학정밀업체 대표는 “대부분 남의 건물에 세 들어 있는 공장을 어떻게 전부 뜯어고치냐”며 “아무리 유예기간을 줘도 글로벌 기업 수준의 기준이라 지키기 어렵다”고 말했다.

화관법의 직격탄을 맞은 도금업계는 50인 미만 업체가 대부분이다. 가동률은 20~30%대, 평균 부채비율은 400% 이상이다. 직원이 다섯 명 미만인 가내수공업 형태로 월평균 매출 3000만원 이하인 영세업체가 수두룩하다. 공장 임차료도 못 내고 고용유지지원금으로 버티는 곳이 많은 상황에 화관법은 엎친 데 덮친 격이다. 환경부에선 화관법을 지키기 어려운 업체에 컨설팅과 융자를 지원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컨설팅을 받아봤지만 어떤 법을 어겼는지를 알려주는 정도”라고 했다.

화학물질을 다루는 각 업체는 환경부 산하 기관 외에도 시청 구청 소방서 산업통상자원부 등으로부터 연간 40여 차례에 달하는 점검과 검사를 받게 된다. 검사 수수료만 해도 업체당 한 해 400만원 안팎이다. 3000여 개 업체가 있는 도금 업종은 연간 120억원에 달하는 비용이 든다는 게 업계 추산이다.

유해물질 사용량을 과도하게 산정하는 것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예를 들어 황산 1t이 들어간 물 10t(농도 11%)에 대해 유해물질 취급량은 1t(황산)이 아니라 10t(황산 섞인 물)으로 판단해 규제를 가한다. 더욱이 가동 중인 설비에 화학물질 품목과 용량이 추가될 때면 공장 가동을 전면 중단해야 한다. 1~6개월가량 걸리는 사전 영업 변경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동차·섬유·가전 등 제조업 타격”
환경부는 화관법상 취급 시설에 대한 정기검사 유예가 종료됨에 따라 오는 10월부터 본격적인 처벌에 나설 방침이다. 환경부 관계자는 “단속을 추가 유예했기 때문에 더 이상 미룰 순 없다”고 말했다. “10월부터 예정대로 단속을 나가 법을 어길 경우 ‘경영개선명령’을 내리고 이후 이행상황을 지켜본 뒤 처벌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중소기업중앙회는 연매출 11조원, 종사자 11만 명인 도금업계 전체가 공멸할 우려가 있다며 환경부에 화관법 처벌을 추가 유예해 달라고 건의하고 있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화관법은 작년 9월에야 실제 이행지침(9개 고시)을 명시했다”며 “5년간의 유예기간으로 업계에 충분한 시간을 줬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화관법을 적용받는 기업은 1만4000여 곳에 달한다. 주로 타격을 받는 도금과 염료·안료업종 기술은 자동차, 반도체, 의류, 가전제품 등 안 들어가는 곳을 찾기 힘든 ‘뿌리기술’이다. “모든 도금업계가 일시에 문을 닫는다면 국내 제조업 전체가 멈춰 설 것”(이상오 한국표면처리공업협동조합 전무)이라는 우려가 나오는 까닭이다.

중기중앙회는 세계 최고 수준인 신규 물질 등록 규제(연간 취급 100㎏ 이상 등록, 100㎏ 미만 신고)도 연간 1t 이상만 등록하는 유럽이나 일본 수준으로 완화해줄 것을 요구했다. 추문갑 중기중앙회 경제정책본부장은 “화학물질 규제는 너무 엄격해서 지킬 수 있는 중소기업이 거의 없다”며 “지킬 수 없는 법을 강요만 할 것이 아니라 기업들이 따라갈 수 있도록 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 화관법

유해화학물질의 취급 기준을 강화한 화학물질관리법. 해당 공장은 내진설계, 배관과 저장시설 규격 등 취급시설 구축 조건을 충족해야 한다. 안전 기준이 기존 79개에서 413개로 늘어났다. 2015년 1월 시행됐지만 5년간 유예를 거쳤고, 환경부는 지난 4월 코로나19 사태로 오는 9월까지 현장 단속을 유예했다.

■ 화평법

신규 화학물질 연 100㎏ 이상, 기존 화학물질을 연 1t 이상 제조·수입하는 업체에 신고·등록 의무를 부과한 화학물질 등록 및 평가법. 신규 물질(연 100㎏ 이상 취급) 등록 규제는 일본(연 1t 이상 취급)보다 10배, 미국(연 10t 이상 취급)보다는 100배나 강도가 높다.

안대규 기자 powerzani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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