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한국에서 집은 '사는 곳' 이상이다

입력 2020-08-17 17:25   수정 2020-08-18 00:26

작은 전셋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한다. 그다음은 아파트 청약으로 ‘내 집’을 마련한다. 집값이 오르면 팔고, 큰 집으로 옮긴다. 은퇴하고 자녀들이 독립하면 집값이 싼 교외로 이사하고, 남은 돈은 은행에 예금해 이자를 받아 쓴다. 예금 금리가 최소 연 7~8% 하던 시기, ‘공식’과도 같았던 중산층의 라이프사이클 재테크였다.

금리가 떨어지자 사람들은 은퇴 후 임대 소득으로 눈을 돌렸다. 사는 집 외에 또 하나의 작은 집이나 오피스텔에 ‘투자’했다. 다주택자가 늘었다. 3년 전엔 정부가 세제혜택을 주며 임대사업을 장려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들이 ‘투기꾼’인 듯 비난받고 있지만.

한국에서 집은 그냥 ‘사는 곳’이 아니다. 가장 든든한 노후 자산이다. 연금과 같은 노후 대비 수단이 정착되지 않은 탓이다. 집 한 채라도 있어야 노후에 걱정의 절반 이상을 덜 수 있다. 쓸 돈이 부족하면 역모기지(시가 9억원 이하 주택만 가능하지만)를 하거나,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생활자금을 대출받을 수 있다. 그게 아니면 자녀에게 나중에 물려준다는 약속을 하고, ‘용돈’이라도 받을 수 있다. 집은 아무리 값이 내린다 해도 최소한 본인과 가족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이 남는다. 만에 하나 투자를 잘못하면 남는 게 없는 주식과 다르다. 무시 못 할 심리적 안전판이다. 그래서 다들 ‘내 집’에 집착한다.

게다가 집값은 계속 올랐다. 일부 전문가들이 저출산 고령화시대 일본 부동산시장의 거품 붕괴 사례를 들며 “부동산으로 돈 벌던 시대는 끝”이라고 외쳤다. 하지만 번번이 양치기 소년이 됐다. 특히 지난 3년 정부가 집값 안정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급등세가 번졌다. 한 곳을 억누르면 다른 곳이 튀어오르는 ‘풍선 효과’가 이어졌다. 부동산 정책에 대한 불신은 대통령과 여당 지지율 급락으로 이어졌다. 일부 여당 관계자들은 8월 말 9월 초면 집값이 떨어질 것이라고 장담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동안 오른 것을 생각할 때 조정받는 수준이라면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싶다. 무엇보다 국민의 58%는 집값이, 66%는 전·월세 값이 1년간 더 오를 것이라고 믿고 있다.

“집은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곳이다.” 부동산 대책을 내놓을 때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을 비롯해 정책 책임자들이 되풀이한 말이다. 집은 투자용이 아니라 거주용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래도 사람들은 집을 사고(buy) 싶어 한다.

이 문구는 원래 서울주택도시공사(SH)의 장기전세주택(시프트) 광고 카피였다. 시프트 등 무주택 서민과 청년, 신혼부부 등을 위한 장기공공임대주택은 ‘주거 복지’ 차원에서 꾸준히 공급이 확대돼 왔다. 지난 8·4 부동산대책에도 공공임대 물량 확충이 포함됐다. 하지만 집값을 안정시킬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살고 싶어 하는 곳의 분양 물량 확대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적인 견해다. 장기공공임대주택 거주자 90% 이상이 “만족”하지만 그래도 10명 중 8명은 “내 집에서 살고 싶다”고 말하는 게 현실이다. 내 집, 기왕이면 ‘좋은 집’에 살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자연스런 욕망이다. 요즘 주식시장에서 빚투(빚내서 투자)하는 2030들도 목돈을 만들면 집부터 사겠다고 한다.

언젠가 인구가 감소하고, 집값이 추세적으로 하락하면 집을 소유하기보다 ‘빌려’ 거주하는 게 유리할 수 있다. 절약한 주거비용을 다른 곳에 투자해 노후자산을 마련해 둔다는 전제하에서다. 지금은 국민연금과 퇴직연금을 합해도 직장 다닐 때 평균소득의 50%가 안 된다. 이를 보완할 장기 금융투자 상품에 대한 신뢰는 부족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최후의 보루’ 집에 매달린다. 전·월세 값은 치솟고, 청약 기회는 바늘구멍이다. 30대의 ‘패닉 바잉’엔 이유가 있다.

psw@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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