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완의 21세기 양자혁명] 실험으로 확인된 양자 제논 효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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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8-19 17:50   수정 2020-08-20 00:08

[김재완의 21세기 양자혁명] 실험으로 확인된 양자 제논 효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물리학’ 책을 현대 철학자들은 ‘형이하학’이라고 부른다. 이 책에 고대 그리스 철학자 제논이 남긴 역설이 소개돼 있다.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한다. 아킬레스가 거북이보다 아무리 빨라도 뒤에서 쫓아간다면 아킬레스가 거북이가 있던 위치에 도달했을 때 거북이는 이미 더 나아가 있고, 다시 그 자리에 아킬레스가 오면 거북이는 또 더 나아가 있고 하는 식이어서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영원히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역설은 “나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고 소개되기도 한다. 화살은 활과 과녁의 중간 지점을 지나야 하고, 다시 이 지점과 과녁의 중간을, 다시 그 지점과 과녁의 중간을 지나야 하는 식으로 무한히 많은 중간을 지나야 하므로 과녁에 도달할 수 없고, 따라서 화살은 정지해 있다는 것이다.

제논의 역설은 고등학교 수학에서 무한급수의 합으로 간단히 해결된다. 반, 반의반, 반의반의반…을 모두 더하면 1이 되므로, 화살은 과녁에 도달한다. 양자물리학에 제논의 역설과 비슷한 표현으로 ‘주전자는 지켜보면 끓지 않는다(Watched pot never boils)’는 양자 제논 효과(Quantum Zeno Effect)가 있다. 재촉한다고 일이 빨리 되지는 않는다는 심리적인 현상을 ‘솥뚜껑을 자주 열어 보면 밥이 익지 않는다’처럼 우리에게 좀 더 익숙하게 표현할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양자 제논 효과는 제논의 역설이 현대 수학으로 부정된 것과 달리 실제 실험으로 확인까지 됐다.
'측정'의 문제와 관련 있는 게 특징
양자 제논 효과는 양자물리학이 고전물리학과 가장 두드러지게 다른 ‘측정’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고전물리학에서 측정은 이미 정해져 있는 물리적 상황에 영향을 주지 않고 알아낼 수 있지만, 양자물리학의 측정은 여러 중첩된 상황 중에서 하나가 확률에 따라 선택돼 나타나도록 한다. 어떤 입자가 갑 상태와 을 상태 사이를 오간다고 하자. 어느 상태에 있는지 측정하면 갑 또는 을로 나온다. 갑에 있는 것으로 측정된 직후에는 을을 향해 진행하는데, 이때 다시 어느 상태에 있는지 측정하면, 을로 진행하지 못하고 갑 상태에서 주저앉게 된다. 이렇게 자주 측정하면 아예 갑의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다. 마치 투수가 자주 견제하면 1루에 나가 있는 주자가 2루로 가지 못하고 1루에 묶여 있는 것과 같은 상황이 되는 것이다.

디지털컴퓨터는 계산이 진행 중일 때도 얼마든지 중간 상황을 점검할 수 있고 결과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양자컴퓨터는 계산이 끝나기 전에는 들여다보면 안 된다. 들여다보는 순간 양자 측정이 이뤄지고, 그 순간 양자상태가 깨져서 양자계산이 중단된다. 그렇지만 어떤 불안정한 양자시스템을 안정화시키기 위해 계속 측정하는 방식으로 양자 제논 효과를 이용할 수도 있다. 특정한 방식의 양자 측정을 자주 해 변화를 가속화시킬 수도 있는데, 이런 경우를 양자 반(反)제논 효과(Quantum Anti-Zeno Effect)라고 한다. 양자 제논과 반제논 효과는 양자 제어의 방식으로 응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아 어려운 양자물리학
해마다 원거리 여행을 하는 철새들이 시각 세포의 분자상태에 생기는 양자 제논 효과를 이용해 지구 자기장의 방향을 알아낸다는 설도 있다. 아직은 설에 불과하지만 아주 예민한 계측에 양자 제논 효과를 이용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심리현상이 양자물리학적인 현상은 아니지만, 그 유사성에 착안해 의사결정에 대한 양자 제논 효과를 연구한 논문도 등장했다. 즉, 어떤 문제에 대해 자주 판단을 내리게 하면 의견이 잘 변하지 않는다는 실험 결과를 얻었다고 한다. 이 실험이 보여주는 것은 의사결정 과정이 양자물리학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양자물리학과 비슷한 면이 있으며 이를 이용해 의사결정 현상을 잘 예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더욱 자주 생각함으로써 그 사랑을 더욱 확실히 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이 세상에 양자물리학을 이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식의 이야기를 한다. ‘이해한다’는 말은 원래부터 알고 있다기보다는,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들과의 비유나 연상을 통해 알게 된다는 뜻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양자물리학이 어려운 것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는 현상 중 양자물리학과 비슷한 것이 별로 없어서다. 양자물리학으로 인해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오히려 이런 새로운 기술을 통해 양자물리학에 익숙해지면 이해의 폭이 더 넓어지지 않을까. 양자 제논 효과와 같은 현상을 이용해 새로운 제어나 계측 기술을 고안할 수도 있고, 양자물리학이 아닌 다른 현상을 이해하는 모델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김재완 < 고등과학원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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