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이드 베트남] '개천의 용' 못 키우는 베트남 교육

입력 2020-08-24 08:30   수정 2020-08-26 07:48

하노이 도심의 도로 풍경은 베트남 사회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증명사진 같다. 크고, 힘 쌘 자동차가 도로를 지배한다. 한 대당 1억원을 훌쩍 넘는 수입차를 탄 이들에게 차선은 그저 도로 위에 그어진 하얀 줄일 뿐이다. 앞을 가로막는 것들을 치우기 위해 고급차를 운전하는 기사들은 습관처럼 경적을 울려대곤 했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의 법칙은 오토바이크 운전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다. 다른 이들보다 앞서려면 인도(人道)로도 거침없이 달려야 한다. 때론 반대 차선까지 점령한다. 무리를 지을 수 있으니 다수의 힘으로 규칙 따윈 무시하면 그만이다. 간혹 자전거를 탄 채 8차선 도로 위를 지나는 이들을 볼 때가 있다. 노인이거나 교복을 입은 학생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들은 마치 홍수 속 고립무원의 섬 같아 보였다. 그들이 베트남 사회를 휩쓸고 있는 ‘속도전’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이방인의 뇌리엔 ‘사회주의 베트남’에 관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가장 신기한 풍경 중 하나는 그 복잡계 속에 방관자처럼 서 있는 교통 경찰이었다. 공권력을 상징하는 그들은 도로 위의 혼란을 통제할 생각이 없거나, 통제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시장경제를 도입한 이후 베트남 사회는 전례 없던 빠른 변화에 직면했다. 경쟁과 질주가 삶의 원칙이 돼 버렸다. 모두가 ‘야망의 시대’를 살아가는데 이의를 달지 않았다. 하지만 자본주의 국가보다 더 자본주의적인 삶의 방식은 사회주의적 가치가 무엇인 지에 의문을 던졌다. 사람들은 결과적 평등을 버리긴 했지만, 적어도 기회의 평등만큼은 지켜질 것으로 믿었다.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기회는 소수의 부유한 자들에게 더 많이 주어졌다. 공직 사회는 음서제나 다름없는 비공개 채용으로 작동했다. 외교부 과장 자리가 비면 외교부 고위 공무원의 자녀들끼리 나름의 경쟁을 벌이는 식이다. 몫 좋은 세관 자리는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졌다.

기회의 문이 닫히고 있음은 교육 현실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까지 각급 학교는 철저히 서열화돼 있다. 베트남 학생들은 대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단계마다 치열한 경쟁을 치러야 한다. 각 단계에서 한 번이라도 낙오하면 다시 사다리를 올라가는 건 불가능하다. 단계를 오르려면 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돈과 정보가 중요하다.

2014년생 아들을 둔 평범한 주부인 응우옌 티 마이(가명)씨는 그녀가 올해 경험한 얘기를 들려줬다. 하노이의 유명 공립 초등학교에 자녀를 보내려던 그녀는 몇 번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원칙상 초등학교 입학은 근접성에 달려 있었다. 본인이 거주하는 동(洞)과 가까운 학교에 배정을 받는 식이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실력 좋은 교사들을 확보하고 있는 공립학교는 그 만큼 평판이 좋았고, 거주지 근접성과 상관없이 학생들을 선발했다. 이런 학교에 서류를 접수하려면 교육부 고위 공무원의 추천서 정도는 있어야 했다.

베트남은 공립 학교 부족 현상에 시달리고 있다. 도시 계획 규정에 따르면 한 동(시>구>동)에 공립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가 각각 1개씩 있어야 한다. 문제는 이런 도시 계획안이 2010년 ‘버전’이라는 것이다. 10년 만에 하노이 인구만 해도 2배 가까이 증가했다. 2010년에 당시 예측한 2030년 하노이 인구수는 900만명이었다. 하지만 하노이 인구는 이미 2019년에 800만명을 넘었다.

공립학교 설립 규정 자체도 문제 투성이었다. ‘공(公)’이 빠진 채로 도시 계획안이 통과된 경우도 상당했다. 공립학교가 아니라 사립학교로 규정상의 숫자를 채우면 그만이었다. 정부와 각 지방자치단체들이 부족한 예산을 이유로 소셜라이징(socializing)을 강조하면서 이 같은 추세는 더 강화됐다. 베트남식 소셜라이징이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민간의 재원과 능력을 적극 활용한다는 의미다. 개념 자체는 나무랄데가 없지만, 현실에선 사회 양극화를 조장하는 경우가 많다. 상하수도 시설은 물론이고, 학교 병원 국립공원 등 각종 공공시설을 민간 업체들이 맡다보니 보편적인 서비스보다는 부자들을 겨냥한 차별화된 서비스를 강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베트남의 공립 학교는 늘 콩나물 교실이다. 한국의 1980년대와 비슷하다. 한 반에 학생 수는 늘 60명을 넘는다. 유명한 공립학교는 하루에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눠 교육을 할 정도다. 특히 유치원의 상황이 심각하다. 한 반에 아이들이 60명 이상인데 선생은 많아야 3명이어서 아이들을 돌보기가 만만치 않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대도시 학부모들은 사립 유치원을 찾게 되는데, 사립이라고 해봐야 교육 품질이 더 떨어지는 일들도 흔하다. 한 유치원 자녀를 둔 학부모는 이렇게 말했다. “과목도 좀 더 다양하고, 시설도 고급스러울 것으로 기대했는데 막상 가보면 일반 주택 한 층을 빌려 교실 하나로 운영하는 걸 보고 실망했다”고 말했다. 지방에선 사립 유치원에서 발생하는 교사들의 아동 학대와 불량한 음식으로 인한 사건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베트남의 일반 서민들이 대부분 맞벌이 부부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같은 교육 품질 문제는 베트남 사회의 활력을 떨어뜨리는 고질적인 병폐 중 하나다.

하노이 식자(識者)들 사이에서 벌어졌던 암스테르담 학교 민영화 논란은 베트남 공교육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암스테르담은 하노이에서 쭈반안과 함께 최고의 공립 학교로 꼽히는 곳이다. 1972년 베트남이 미국과의 전쟁으로 잿더미가 되던 때에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시장이 하노이 시민에 대한 지지와 함께 교육 지원을 천명했는데 그 결실이 암스테르담 학교다.1985년 설립돼 4년제 중학교와 3년제 고등학교를 합쳐서 운영 중이다. 하노이를 비롯해 전국에서 수학과 과학 등에 뛰어난 영재들이 암스테르담 학교를 거치면서 ‘암스테르담 동문’은 하노이에선 가장 막강한 학맥 중 하나로 꼽힌다.

암스테르담, 쭈반안과 같은 유명 공립학교는 ‘개천의 용’들을 키우는데 역할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경제 성장과 함께 부가 대도시로 집중되고,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면서 암스테르담 같은 유명 공립학교는 고급 사립학교처럼 변질되기 시작했다. 암스테르담에 입학하려면 시쳇말로 돈 보따리를 싸들고 과외를 받아야 가능하다. 과외 교사로는 현직 유명 공립학교 교사들이 활약한다. 막상 입학을 하더라도 학비는 어지간한 사립 국제학교 못지 않다. 원칙상 공립학교 학비를 내도록 돼 있지만 실제로는 학부모들이 학교 운영을 위한 각종 비용을 분담하기 때문이다.

37세 한 여성은 이렇게 말했다. “매주 보충 영어수업을 하는데 교사 비용을 학부모가 대야한다. 점심값을 포함해 오후에 학생들이 학교에 머무는 동안 들어가는 비용도 모두 학부모 몫이다. 여기엔 에어컨을 돌리기 위한 전기세, 생수, 손수건, 손 소독제 등이 포함된다” 그나마 이 여성은 유명 공립학교는 교사의 질이 그나마 좋고, 학비 역시 부대 비용이 들긴 하지만 하노이 시내 유명 사립학교와 비교해보면 조금이라도 저렴한 편이라는 것에 위안을 삼는다. 암스테르담 학교 민영화 얘기가 공감을 얻은 것은 이런 배경에서다. 차라리 사립학교로 만들어서 학비를 대폭 올리고, 이를 통해 ‘개천의 용’들에게 장학금 혜택을 주자는 논리다.

베트남의 교육 불평등은 비효율적인 교사 시스템과 연관돼 있다. 우선 교사들의 대도시 쏠림 현상이 심각한 상황이다. 얼마 전 베트남 TV에 산간 소수민족들을 대상으로 교육에 헌신하고 있는 여선생의 사례가 소개됐다. 그녀는 출산 후에도 아이를 도시에 있는 친정에 맡기고는 산간 학교로 돌아갔다. 당시 TV 속 방청객들은 여선생의 영웅적인 헌신에 환호했다. 역설적으로 산골로 돌아간 여선생의 사례는 그런 일이 매우 드물다는 방증이다. 대부분의 교사들은 병원 등 생활 인프라가 갖춰진 대도시를 선호한다. 한국은 이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도서 산간 지역으로 파견되는 교사에겐 인사상 가점 등 각종 인센티브를 제공하고 있다. 교장으로 승진하려면 젊은 시절에 섬마을 교사를 한번쯤은 해봐야 한다는 얘기다. 베트남에선 이 같은 인센티브 제도가 아직 없다.

박동휘 기자 donghuip@hankyung.com
“본 기획물은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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