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기업지배구조 잔혹사

입력 2020-09-01 17:55   수정 2020-09-02 00:06

20여 년 전,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급전을 빌려 외환위기를 수습하던 우리나라에서 법규제상 주요 관심사 중 하나는 기업지배구조였다. 당시 사람들에게 생소했던 이 단어는 이후 지속적인 ‘개선’ 대상으로 국회 및 규제 기관들의 관심을 받는다. 21대 국회에서도 초반부터 맹공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업지배구조란 한마디로 기업의 의사결정이 어떻게 내려지는가에 대한 구조다. 승승장구하는 듯 보이던 재벌과 은행들이 쓰러지고 사상 초유의 국가 부도에 직면하자, 왜 이런 상황이 벌어졌는가라는 당연하고도 절박한 질문이 제기됐다. 그 답으로 떠오른 것 중 하나가 재벌 총수에 의한 독단적 의사결정이었다. 당시 이런 문제의식은 세계 최대 경제대국인 미국과의 비교에서 비롯된 부분이 컸다. 미국의 대기업들은 대부분 그 주인이 누구인지 뚜렷하지 않고 최고경영자가 이사회의 통제를 받으면서 잘 운영되는 것 같은데, 한국의 재벌들은 총수가 마음대로 하다가 사달이 났다는 것이었다. 총수들이 지분을 많이 갖지도 않은 채 그룹 전체를 좌지우지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는 주장도 더해졌다.

처방은 총수의 힘 빼기와 소수주주의 권리 강화로 요약된다. 정도 차이는 있었지만 20년 넘게 유효했던 이 처방은 21대 국회에서 재도약을 맞고 있다. 상법과 공정거래법, 각종 금융 관련 법률들이 직간접적으로 기업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칠 목적으로 제정 또는 개정 논의 중이다. 복잡해 보이는 관련 법안 내용도 총수 힘 빼기든지, 소수주주권 강화든지로 이해하면 대개 맞다.

우리나라 대기업들은 대부분 대주주가 누구인지 명확하다. 물론 대주주가 소수주주들의 이익을 해치는 행위를 하는 것은 막을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 규제상 이사회의 권한은 충분히 강화됐고, 이사들의 책임도 크게 늘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나라가 부러워했던 미국이 20세기 중반부터 고민해 온 것은 기업들에 뚜렷한 주주가 없어 최고경영자가 주주들의 이해에 반하는 행위를 하는 것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문제였다.

게다가 선진국 사이에서도 기업지배구조는 매우 다양하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업지배구조에 대한 연구가 미국을 중심으로 이뤄지다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정보 수집이 쉬워지자 2000년 전후로 여러 나라의 기업지배구조를 비교하는 연구가 늘어나며 드러난 결과다. 결론적으로 기업지배구조에 정해진 답은 없다. 글로벌 금융위기 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위기의 원인으로 대형 금융회사들의 주요 주주인 기관투자가들이 아무도 책임 있게 금융회사를 들여다보지 않은 탓도 있다고 분석했다.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왜 필요한가. 애초에 재벌의 줄도산 사태가 없었다면 제기되지 않을 수도 있었던 문제라는 것은, 기업지배구조 개선이라는 더 나은 기업 성과를 목표로 한다는 뜻이다. 역으로 기업 성과가 좋다면 기업지배구조를 바꿀 필요성은 떨어진다. 지난 20년 동안 재벌의 옥석이 가려지고 일부는 세계적인 기업으로 도약했다. 정보통신산업을 중심으로 작게 시작해 대기업의 반열에 오른 기업도 다수 나타났다. 그간 기업지배구조 ‘개선’ 규제 강화로 기업 운영이 ‘선진화’된 결과 성과가 더 좋아진 것이라는 주장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의사결정 절차가 복잡해지면서 느려지고 역동성이 떨어지는 부작용도 분명히 있다.

얼마나 더 기업지배구조에 규제를 가할 것인지는 결국 이 규제가 기업 성과에 득이 될지 실이 될지로 판단해야 한다. 그리고 어떤 지배구조가 효과적일지는 1차적으로 기업이 고민할 문제다. 기업의 의사결정은 본질적으로 민주적일 수 없다. ‘보기에 좋더라’라는 관점으로 방향을 정해서는 정말 곤란하다. 국가 권력이 기업지배구조에 사회정의를 실천하겠다고 나서면 소수주주로 스며든 외국인투자자들에게 손쉬운 먹잇감을 제공하는 셈이 된다. 고용이 최우선 과제인 지금 외국인들에게 우리나라 고용 보호를 기대할 수 있을까. 각자도생의 험난한 시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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