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아베스'와 상왕정치

입력 2020-09-03 17:56   수정 2020-09-04 00:17

일본의 경제력은 세계 3위지만 ‘민주주의 지수’는 24위로 낮은 편이다. 일본 특유의 계파·세습 정치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아들, 손자가 대를 잇는 ‘세습 왕국’을 빗대어 “아들에게 지역구를 넘겨주는 정치수법은 정해진 가문에서만 계속 다이묘가 배출되는 에도시대의 번(藩)과 다를 게 없다”는 비판이 거센 데도 좀체 바뀌지 않는다.

총리 선출도 계파 간 담합과 세습 정치인의 막후 입김으로 이뤄진다. 당권을 쥔 실권자는 ‘바지사장’을 총리로 앉히고 상왕(上王) 노릇을 한다. 그 배경에는 돈과 조직이 있다. 대표적인 인물이 1972년부터 2년 반 동안 총리를 지내고 이보다 훨씬 긴 기간 ‘상왕’으로 군림한 다나카 가쿠에이다.

다나카는 한 초선 의원이 곤란한 상황에 처해 100만엔(약 1000만원)을 급히 빌려달라고 요청하자 흔쾌히 수락했다. 초선 의원이 봉투를 받아 열어보니 300만엔과 메모가 들어 있었다. 메모엔 ‘나머지 100만엔은 신세진 사람들에게 밥을 사거나 감사 선물을 보내고, 또 100만엔은 훗날에 대비해 남겨두도록 하라’고 쓰여 있었다. 감격한 그는 눈물로 충성을 맹세했다.

이렇듯 일본 정치의 이면에는 돈과 인맥의 그물이 촘촘하게 엮여 있다. 선거도 정당보다 ‘고엔카이(後援會)’라고 불리는 후원회에 의해 좌우된다. 여기에 계파·세습 정치가 겹쳐 이른바 ‘상왕 정치’가 가능해졌다.

최근 물러난 아베 신조 총리의 후임을 놓고도 ‘상왕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집권 자민당의 7대 파벌 중 5개 파벌이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을 차기 총리로 밀기로 했다. 표면적 이유는 ‘아베 정책 계승’이지만, 아베가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는 ‘아베스(아베+스가) 정권’을 노린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1982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도움으로 총리 자리에 오른 후 ‘다나카소네(다나카+나카소네)’ 내각으로 불린 것과 비슷하다.

일본 외에도 러시아의 푸틴이 심복인 메드베데프에게 대통령을 맡기고 상왕 노릇을 하며 ‘푸틴데프 정권’을 누린 적이 있다. 중국의 덩샤오핑이 국가주석과 당 총서기를 겸임하지 않고 심복들에게 맡기거나, 장쩌민이 후진타오의 상왕이 된 일도 있다.

권력에 취하면 약이 없다고 했다. 아베는 몸마저 성치 않다. ‘천하를 다 얻고 건강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랴’라는 경구도 들리지 않는 모양이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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