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정지용이 죽은 윤동주 시집에 서문 쓴 까닭

입력 2020-09-04 17:38   수정 2020-09-05 00:10

‘청년 윤동주는 의지가 약하였을 것이다. 그렇기에 서정시에 우수한 것이겠고, 그러나 뼈가 강하였던 것이리라. 그렇기에 일적(日賊)에게 살을 내던지고 뼈를 차지한 것이 아니었던가?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구나! (…) 일제강점기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뱉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슬프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정지용 시인은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서문을 쓰면서 깊은 탄식과 문학적 찬사를 동시에 담아냈다. 1947년 12월 28일 쓴 이 서문을 달고 시집이 나온 날짜는 이듬해 1월 20일. 윤동주가 일본 후쿠오카에서 옥사한 날(1945년 2월 16일)부터 약 3년 뒤였다.

정지용은 이에 앞서 윤동주의 유고시 ‘쉽게 씌어진 시’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렸다. 그가 주간으로 재직하던 경향신문 1947년 2월 13일자에 소개글과 함께 게재했다. 사흘 뒤에 열린 윤동주 첫 추도회에도 참석했다. 서문 집필에 이어 시집 발간 작업까지 도왔다.

정지용은 왜 이토록 윤동주를 아꼈을까. 그는 윤동주의 시에서 자신을 닮은 문학적 향기와 시대적 고뇌를 발견했다. 자기 시와 비슷한 제목들에도 눈길이 갔다. 금강산 여행 후에 쓴 ‘비로봉’ 등을 비롯해 ‘슬픈 인상화’와 ‘별똥’(정지용), ‘아우의 인상화’와 ‘별 헤는 밤’(윤동주) 등 공통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자신의 ‘향수’와 ‘고향’을 떠올리게 하는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에도 주목했다. 그의 ‘향수’가 고향을 상실한 모든 사람의 동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면, 윤동주의 ‘또 다른 고향’은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는 자기 결단의 절박한 순간을 그리고 있다.


윤동주가 ‘또 다른 고향’을 쓴 1941년은 조선어 교육이 금지되고 태평양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던 시대다. 정지용이 고향을 노래하던 1920년대 상황과는 달랐다. 윤동주는 1942년 창씨개명을 한 뒤 고국에서의 마지막 작품 ‘참회록’을 썼다. 일본 유학을 위해 도항증명서를 발급받으려면 창씨개명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이는 말할 수 없는 치욕이었다.

정지용은 이런 시인의 고통에 가슴이 미어졌다. 정지용과 윤동주를 함께 연구해 온 최동호 시인은 “이때 정지용은 민족적 양심선언의 거울로 윤동주 시를 읽었고, 그것을 시인의 이름으로 민족 앞에 내놓고 싶었을 것”이라며 “정지용의 서문은 윤동주를 암흑기 식민지시대를 별처럼 빛내는 시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평했다.

정지용은 1923년부터 일본 교토의 도시샤대에 유학해 영문학을 공부했다. 윤동주도 약 20년 후 그의 뒤를 따라 이 대학 영문과에 입학했다. 이 대학은 기독교 계열 학교이고, 정지용(가톨릭)과 윤동주(개신교)도 기독교 신자였다. 윤동주는 어릴 때부터 정지용을 존경했다. 평양 숭실중 재학 시절 《정지용시집》을 사서 밑줄을 긋고, 촘촘하게 메모하며 ‘동주 장서’라는 글도장까지 찍었다.

이 시집에 실린 ‘별똥’ ‘호수1’ 같은 동시들에 큰 감명을 받아 본격적인 동시 창작에도 나섰다. 윤동주가 습작 시절 정지용의 영향을 많이 받긴 했지만 둘의 시상과 문학적 지향은 각기 다르다. 정지용이 감각적인 언어 표현에 중점을 뒀다면, 윤동주는 내적 고뇌의 표현에 집중했다.

정지용이 서문을 쓰던 시기는 좌우의 편 가르기가 극에 달한 정치적 혼란기였다. 어느 쪽에도 치우치고 싶지 않았던 정지용은 정치적 대립을 뛰어넘어 순결한 서정을 보여주는 윤동주 시를 높이 평가했고, 윤동주 되살리기에 더 앞장섰다.

정지용은 1950년 6·25 발발 석 달 뒤, 경기 고양 녹번리(현 서울 녹번동) 집에서 북한군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가 북으로 끌려가던 도중 폭격으로 세상을 떠났다. 한때 월북자로 오인 받았던 그는 1988년에야 해금됐다. 북에서도 오랫동안 ‘부르주아 반동문학’으로 찍혔다가 1990년대에 복권됐다. 오는 25일은 그가 안타까운 삶을 마감한 지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교토 도시샤大 교정에 나란히 선 두 시비
일본 교토 도시샤대 교정에 정지용과 윤동주의 시비(詩碑)가 10여m 사이로 서 있다. 지하철역 3번 출구에서 도보 1분이면 닿는 대학 서문 쪽에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왼쪽의 빨간 벽돌 건물인 채플이 보이고 그 앞에 두 시비가 사이좋게 서 있다.

정지용 시비에는 ‘압천 십리 벌에 해는 저물어’로 시작되는 시 ‘압천(鴨川)’이 새겨져 있다. 압천은 학교 앞을 가로지르는 강(가모가와)의 한자 이름이다. 그 옆의 윤동주 시비에는 ‘서시’가 새겨져 있다. 이들의 시비를 찾는 방문객은 1년에 약 2만 명에 이른다. 일본인 중에 두 사람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도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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