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재정법을 맘대로 하고 싶다는 의원들 [여기는 논설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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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2020-09-09 09:30   수정 2020-09-11 08:27

국가재정법을 맘대로 하고 싶다는 의원들 [여기는 논설실]


국회의원들이 국가재정법과 싸우고 있다. 21대 국회 출범 이후 국가재정법 일부개정법률안 의원 발의가 이 시점을 기준으로 36건이다. 국가재정법 개정 의원 발의는 18대 144건, 19대 157건, 20대 187건이었다. 지금 추세대로면 21개 국회는 국가재정법 개정 의원 발의 건수에서 또 기록을 갈아치울 게 뻔하다.

의원들이 왜 국가재정법 개정에 집착하는지 그 이유는 21대 국회 들어 발의된 국가재정법 일부개정법률안의 내용에서 잘 드러난다. 예비타당성(예타)조사 무력화· 완화·견제·개정(14건) 재정준칙(3건) 기금 설치(12건) 예·결산제도 관련(7건) 등이다. 예타조사 관련 발의가 무분별한 세금낭비를 막고 효율적이고 지속가능한 재정운영을 하기 위해 재정준칙을 법제화하자는 발의를 압도하고 있다.

예타조사는 대규모 국가예산이 투입되는 사업에 대해 기획재정부가 그 타당성을 사전에 검증하는 제도다. 예산 낭비와 사업 부실화를 방지하고 재정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김대중 정부 때인 1999년 도입됐다. 선거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공공인프라 투자 등에서 자원배분의 왜곡을 부르는 ‘포크 배럴(pork barrel)’ 지출을 불사하는 게 정치인이란 것은 긴 설명이 필요없다. 예타조사 도입의 핵심적인 목적은 이런 포크 배럴 지출 억제에 있다. 의원들은 지금 이 걸림돌을 제거하겠다는 것이다.

예타조사를 피해나가려는 국가재정법 의원 발의는 대충 세 가지로 정리된다. 하나는 예타조사 대상이 되는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 국가 재정지원 300억원 이상이란 기준을 올리는 것이다. 예타조사를 피해나갈 공간이 그만큼 커진다. 또 하나는 국가균형발전 사업처럼 예타 면제 대상을 넓히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예타조사 자체를 있으나마나한 제도로 만드는, 다시 말해 무력화하는 것이다. 김두관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대표 발의한 국가재정법 일부개정법률안이 여기에 해당한다.

제안 이유와 주요 내용은 이렇다.

“현행 국가재정법은 기재부장관이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고 국가의 재정지원 규모가 300억원 이상인 신규사업에 대하여 예타조사를 실시하도록 하고,「과학기술기본법」 제11조에 따른 국가연구개발사업에 대한 예타조사의 경우 과학기술정보통신부장관에게 위탁할 수 있도록 하고 있음.
그런데 다양한 분야의 국가사업에 대하여 기재부장관이 일률적으로 예타조사를 실시함으로 인하여 사업의 진행 여부가 비용-편익분석과 같은 경제적 효율성 측면에 의해 결정되고, 지역 간 균형 및 형평성에 대한 고려가 부족하다는 의견이 있음.
이에 예타조사의 주체를 기재부장관에서 각 중앙관서의 장이 담당하도록 하고, 지역 균형발전을 위한 사업 중 구체적인 사업 계획이 수립되고 국무회의를 거쳐 확정된 사업의 경우 국가균형발전위원회가 예타조사를 실시하도록 함(안 제38조, 제38조의2 및 제38조의4 신설).”

결론 부분이 핵심이다. 기재부의 예타 조사권은 각 사업 소관부처로, 균형발전사업 예타조사권은 국가균형발전위원회로 넘기라는 얘기다. 전문성· 특수성을 고려해 과기정통부에 예타조사를 위탁한 경우를 근거로 들어 모든 분야로 일반화하자는 것이다.

이리되면 기재부가 예타조사를 잘하니 못하니의 차원을 훨씬 뛰어넘게 된다. 사업의 소관부처가 아닌 기재부가 ‘객관적·중립적 기준으로’ ‘공정하게’ 조사하라고 도입된 예타가 사실상 무력화되고 마는 것이다. 가뜩이나 사업을 키우려고 혈안인 각 부처는 예타조사를 요식행위로 전락시킬 게 뻔하다. “(중앙정부는) 가장 필요한 사업이 뭔지 제일 잘 아는 지방자치단체가 제안하는 사업을 들어주는 게 맞는다”고 말하는 국가균형발전위원회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기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국회 상임위에 꼼찍 못하는 부처들, 지자체와 짝자꿍인 의원들을 떠올리면 앞으로 벌어질 모습이 훤히 내다보인다. “지역구에 한 푼의 예산이라도 더 가져가야 하는 국회의원들이 (그동안) 기재부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기에, 누구도 예타에 쉽게 손 댈 수 없었다”는 김 의원의 한풀이가 드디어 완성되는 것이다.

이명박 정부, 박근혜 정부 때다. 당시 야당이던 더불어민주당은 예타조사를 제대로 해야 한다고 했다.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말이 확 달라졌다. 집권 후 국정운영5개년계획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대형 SOC에 대해 예타조사 등 필요한 사전절차 이행 후 추진한다고 했던 약속은 온데간데 없어졌다.

지난해 1월 국무회의에서는 국가균형발전 프로젝트로 포장한 총 23개 사업, 24조 1000억원에 이르는 예타 면제 대상사업을 확정됐다. 지난해 4월에는 수도권과 비수도권의 평가비중을 달리 적용하고 평가 가중치를 조정하는 등 대대적인 개편방안도 발표됐다. 예타가 사실상 형해화되고 있다.

기재부의 예타조사를 시작단계에서부터 맡았던 한국개발연구원(KDI)은 2014년 ‘공공인프라 투자의 지역 안배와 포크배럴’ 보고서에서 우리나라 정치인은 사적(私的) 유인 때문에 지역주민이 원하는 공급량마저도 초과하는 포크 배럴 지출을 한다는 점을 지적했다. 또 자신이 지지를 받는 지역에서 그렇지 않은 곳에 비해 포크 배럴 지출을 증가시킨다는 점을 밝혀냈다. 이런 이유로 경계해야 한다고 주문했던 예타조사에 대한 정치적 영향력 확대가 기어이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국회는 예산심의권만 갖고 있는데도 ‘쪽지예산’이란 이름으로 정부의 예산편성권을 훼손시켜온 의원들이 예타조사마저 무용지물로 만들면, 그 다음은 무엇이겠는가. 정부의 예산편성권을 아예 국회로 넘기라고 할 공산이 크다. 국회의 예산 전문성 부족은 만천하에 드러난지 오래다. 예타조사 무력화에서 보듯 의원의 개인·집단·지역·계층의 이익 챙기기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다. 그런 국회가 예산편성까지 다 한다고 상상해 보라.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에 대한 통제선은 이미 무너졌다. 한번 고삐가 풀리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게 채무의 속성이다. 한국에서 ‘재정건전성’이란 말 자체가 사문화되는 날이 곧 올지 모른다.

안현실 논설·전문위원 ah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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