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디-버디-이글' 하루 3번 칩인…"이미림, 꿈같은 대역전극 썼다"

입력 2020-09-14 17:33   수정 2020-12-13 00:02


“마법 같은 쇼트게임.” “꿈의 시나리오.”

이미림(30)의 메이저 대관식을 바라본 미국 현지 언론들의 찬사다. 기적 같은 세 번의 칩인으로 그는 ‘여자골프 역사상 가장 극적인 역전 드라마’를 연출하며 ‘포피스 폰드(Poppie’s Pond)’에 몸을 던졌다. 미국여자프로골프(LPGA)투어 ANA인스퍼레이션(총상금 310만달러) 챔프만이 누리는 꿈의 시나리오가 그에게 현실이 됐다.

이미림은 14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랜초미라지의 미션힐스CC(파72·6763야드)에서 열린 대회 최종 4라운드에서 3개의 ‘칩인’을 앞세워 생애 첫 메이저 우승을 따냈다. 이날 그는 이글 1개와 버디 4개, 보기 1개를 묶어 5언더파 67타를 쳤다. 최종합계 15언더파 273타. 2타 차 공동 3위로 최종일을 시작한 이미림은 브룩 헨더슨(23·캐나다), 넬리 코르다(22·미국)를 연장으로 끌고 갔고, 첫 홀에서 혼자 버디를 잡아 우승 상금 46만5000달러(약 5억5000만원)의 주인공이 됐다. 2017년 3월 KIA클래식 이후 3년6개월 만에 수확한 4승째다. 이미림은 “하루에 두 번 칩인은 있었는데, 세 번은 처음”이라며 “우승이 믿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칩샷! 칩샷! 칩샷!
전문가들은 미국프로골프(PGA)투어 정상급 선수들의 10m 안팎 거리 칩샷 성공률을 약 5~8%로 본다. 이미림은 이를 하루 세 번이나 해냈다. 행운과 실력이 맞아떨어져야 가능한 일. 이날은 말 그대로 ‘그분이 오신’ 듯했다. 시도한 칩샷이 모두 홀로 향했다.


6번홀(파4)에선 약 10m 오르막 경사 칩샷을 꽂아 넣었고, 16번홀(파4)에선 그린 근처 27m에서 공을 높게 띄운 뒤 그린 언덕에 떨궈 굴려 넣었다. 마치 퍼팅하는 듯했다.

이때만 해도 다가올 듯했던 우승은 그러나 다시 달아났다. 17번홀(파3)에서 2m짜리 파퍼트를 놓쳐 선두 코르다에게 2타 뒤졌기 때문이다. 쓴웃음을 지은 이미림의 얼굴에도 패색의 그늘이 짙게 드리웠다. 단독 3위 정도를 예상하던 그에게 18번홀(파5)에서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5번 우드 세컨드 샷이 200m가량 날아가 아일랜드 그린 뒤 파란색 펜스를 맞힌 뒤 멈춰선 게 시작이었다. 원래 VIP 관중석이 있어야 할 자리. 하지만 갤러리 입장이 어려워지자 대회 주최 측이 ANA를 상징하는 파란색 설치물을 세우면서 ‘벽’이 생겼다. 이미림은 “(파란 벽을) 백보드 삼아 치는 샷을 연습라운드에서 해봤다”며 “의도된 샷이었다”고 했다. 아마추어 골퍼들이 즐겨 말하는, 이른바 ‘장애물 협찬’을 받아낸 격이다.

이어진 세 번째 샷. 홀 20m 뒤 언덕에서 친 칩샷이 깃대를 맞히더니 홀로 빨려들어갔다. 칩샷 이글. 순식간에 15언더파 동타를 만든 이미림은 타수를 줄이지 못한 헨더슨, 코르다와 함께 연장에 들어갔고 혼자 버디를 낚아 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때도 그는 퍼터를 들었다가 다시 웨지로 바꿔 칩샷을 시도했다. 공은 홀 앞 1.5m에 붙어 손쉬운 직선 퍼팅 버디를 선물했다.
“먹고 자는 시간 빼고 종일 스윙 연습”
초등학교 4학년 때 골프연습장을 하던 아버지에게 처음 골프를 배운 이미림은 2008년 국가대표를 거쳐 2009년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2부 투어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2011년 에쓰오일 챔피언스 인비테이셔널에서 첫 승을 차지한 뒤 2012년 국내 메이저인 한국여자오픈을 제패했고 이후 2014년 퀄리파잉스쿨을 거쳐 LPGA 투어에 데뷔했다. 172㎝의 좋은 체격을 앞세워 첫해 2승을 따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하지만 승수를 쌓는 속도가 더뎠다. 과다 연습으로 입은 ‘손목 피로 골절’이 그를 괴롭혔다. ‘연습벌레’로 알려진 그는 연습량을 줄여야 했다. 그사이 15위까지 올랐던 세계랭킹은 90위권으로 밀려났다. 이미림의 자신감도 함께 떨어졌다.

반등 계기는 지난 6월 국내에서 열린 한국여자오픈이다. 코로나19 여파로 국내 체류기간이 길어지자 실전 감각 유지 차원에서 나간 대회였다. 결과는 커트 탈락. 충격을 받은 그는 배수진을 쳤다. ‘2차 전지훈련 캠프’를 차렸다. 하루 3시간씩 웨이트를 해 체중을 7㎏ 감량했고, 먹고 자는 시간을 빼곤 스윙 연습만 했다. 김송희 코치(32)와 함께 드라이버샷을 다듬으면서 자신감도 되찾았다. 김 코치는 “(이미림이) ‘왜 골프를 해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할 정도로 힘들어했다”며 “이번에 한꺼번에 (보상으로) 온 것 같다”고 말했다.

이미림의 우승으로 한국 선수 메이저대회 우승 행진도 10년 연속 이어지게 됐다. ‘홈팀’ 격인 미국 선수들도 최근에는 내지 못한 진기록이다. 올 시즌으로는 박희영(ISPS한다빅오픈), 박인비(ISPS한다호주오픈)에 이어 세 번째 우승이다. 이 대회 우승은 여섯 번째.

양희영(31)과 이미향(27)이 나란히 7언더파 공동 15위에 올랐다. 전인지(26)가 6언더파 공동 18위, 박성현(27)이 이븐파 공동 40위, 박인비(32)가 1언더파 공동 37위로 대회를 마쳤다.

조희찬 기자 etwood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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