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기르는 가축은 전 세계 38종이다. 교배종을 합치면 약 8800종에 달한다. ‘종 다양성’을 지키는 것은 다가올 기후 위기에 대응할 수 있는 체력을 기르는 것과 같다.
세계 각국의 가축 지도가 기후 변화의 바로미터로 쓰이고, 식량자원으로서 어떤 종이 멸종했을 때 또다른 교배종이 이를 대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기후변화로 인해 축산업 위기, 식량 위기가 처했다고 보고 있다. 2015년부터 182개국에서 기르고 있는 고유 품종을 조사해 한 눈에 볼 수 있는 지역동물다양성 정보 시스템(DAD-IS)을 만든 이유다.
다음 달 FAO 시스템에는 경북 포항 송학농장에서 기르고 있는 ‘경상북도 재래돼지’가 여기에 이름을 올린다. 국내에서 생산되는 돼지 품종으로는 30번째, 민간 돼지 농가로는 최초의 성과다.
15일 이한보름 송학농장 대표(41)는 “일제강점기 이전 수천 년간 한반도에 정착했던 재래돼지 품종의 DNA를 2대에 걸쳐 복원했다”며 “FAO 등재로 재래돼지가 식량 자원으로서의 가치를 인정 받고 국제 무대에서 로열티를 받으며 상업적으로 거래될 수 있는 물꼬를 튼 것”이라고 말했다.
송학농장은 민간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재래돼지 사육 농가다. 현재 일반 돼지 3500두, 재래돼지 300두를 키운다. 재래돼지는 '털이 검고 코가 길며 안면 주름이 있고 턱이 곧다'는 특징이 있다. 맛과 품질이 뛰어나지만 생산성이 낮다. 수입 품종을 교배, 가장 많이 먹는 흰 돼지(삼원교잡종)은 6개월을 키우면 100~115kg까지 큰다. 재래돼지는 그 보다 두 배인 1년을 키워도 90kg에 불과하다. 투입 대비 산출이 턱없이 적다. 돈을 벌기 위해선 절대 키울 수 없다는 얘기다. 이런 논리로 모든 산업이 대량생산에 집중하던 1970~1980년대에 재래돼지는 거의 자취를 감췄다.
10년 넘는 시간을 들여 재래돼지 복원에 성공, 이 공로로 축산 농민으로는 이례적으로 2003년 철탑산업훈장을 받기도 했다. 이 대표는 아버지가 복원한 재래돼지를 2007년 영남대 동물생명과학 대학원 연구팀에서 DNA 연구를 지속, 재래돼지 DNA 분석 관련 특허를 냈다.
이번 FAO 등재는 재래돼지를 프리미엄 축산업으로 가고자 하는 이 대표가 내디딘 첫 걸음이다. 경북축산기술연구소와 함께 2년 여간 재래돼지의 특성 등을 토대로 등재 작업에 매진했다. 앞으로 해외에서 재래돼지 품종을 기르고 싶다면 송학농장에 로열티를 내고 돼지를 사가야 한다.
"재래돼지는 시중 돼지 가격에 비해 7~10배 비쌉니다. 사육비 등을 감안해 1kg당 9만원까지 거래됩니다. 1990년대에 전문 식당도 열여봤지만 소비자가 없었어요. 지금은 달라졌습니다."
이 대표는 프리미엄 축산업이 쇠락한 농촌을 살리는 길이라고 보고 있다. 기업형 축산으로 돼지값이 떨어져 사육을 포기한 농민들도 높은 값을 받을 수 있는 재래돼지를 키워 수익을 보전할 수 있다면 지속가능한 축산이 가능할 것이라는 믿음이다.
그는 최근 포항에 숙성연구소인 '에이징랩'을 만들어 재래돼지를 숙성, 가치를 더 끌어올릴 수 있는 실험을 하고 있다.
이 연구소는 전국 각지에서 찾아오는 셰프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가격은 비싸지만 납품받고 싶다'는 고급 레스토랑들도 점차 늘고 있다.
김보라 기자 destinyb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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