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는 논설실] 부활한 통신비 집착증

입력 2020-09-16 09:30  



요즘 정부·여당 사람들의 입에 붙은 말이 하나 있다. '국민 동의'와 '국민 정서'다. 의사 국가고시 미응시 의대생들을 구제해주느냐는 문제에서 국민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묘한 어법을 쓴다. 과연 '국민 동의' 여부를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싶다. 여론조사 추이를 보거나 자칭 국민을 대변한다는 유력 정치인들의 입을 주목하는 수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긴 했지만 지난 8일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의대생 구제에 '반대'한다는 응답이 52.4%로 나타났다. '국민 동의'가 아직 없다고 정부가 판단하는 이유다.

'국민 정서'를 받아들이는 데 일관성 있는 것도 아니다. 지난 11일 여론조사(리얼미터)에선 응답자의 58.2%가 '전국민(13세 이상) 통신비 2만원 지급'에 반대했는데도 당정은 2만원 지급을 강행하고 있다. "정부가 많은 고민 끝에 판단한 것"(이호승 청와대 경제수석)이라며 반대 여론을 못 본 체 한다. 통신비 지원이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재난지원금) 전달방법"이라는 말에서 속내를 비치긴 했다. 과거 야당시절부터 민주당이 유독 통신요금에 집착해온 점을 떠올리면 왜 이렇게 '통신비 2만원 지급'에 목을 매는 지 이해할 수 있다.
◆과거 통신요금 인하 압박과 그 허실
2000년대 들어 휴대폰 보급이 늘어나면서 시민단체들은 통신요금 문제를 물고 늘어졌다. 국내 업체들이 해외와 비교해 폭리를 취하고 있다는 주장이었다. 심지어는 '원가를 공개하라'며 날을 세웠다. 지금의 민주당이 야당인 때에는 국정감사장에서 '과도한 통신요금'이 단골메뉴로 등장했다. 3G 같은 미래사업의 투자 재원 확보가 필요하다는 당시 업계의 주장은 요금 폭리를 위한 과점대기업의 탐욕으로 비쳐졌다. 야당과 시민단체의 압박과 대국민 선전전이 그만큼 강력했다.

통신산업은 정보기술(IT) 서비스의 가장 중요한 기반이고 정보통신(ICT) 혁명의 핵심이기 때문에 미래사업 투자가 중요하다는 정부의 설명도 업계를 비호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했다. 야당과 시민단체의 요금인하 주장 앞에서 정부 또한 새우등 신세였다.

세월이 흘러 당시 업계와 정부의 주장에 일리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2000년대 초반만 해도 삼성전자의 휴대폰 사업은 노키아, 모토로라 등과 어깨를 겨루며 착실히 경쟁력을 쌓아갔다. 하지만 통신장비 부문에선 루슨트테크놀러지, 시스코시스템스 등에 밀려 거의 포기해야 할 수준이었다. 그래도 장비사업의 명맥을 이어간 삼성전자가 세계 시장을 장악한 스마트폰과 국내 통신업계의 5G 경쟁력을 바탕으로 통신장비 사업의 전기를 마련했다.

삼성의 5G 통신장비 세계시장 점유율(올 1분기)은 화웨이, 에릭슨, 노키아에 이어 4위(13.2%)에 올라 있다. 마침 미국이 화웨이 고사 작전에 나섰고, 그 영향으로 삼성은 미국 1위 이동통신사 버라이즌에 8조원 규모 5G 통신장비 공급 계약을 맺는 잭팟을 터트렸다. 국내 통신업계의 선(先)투자와 기술개발 노력이 있었기에 이런 절호의 기회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해 노웅래 더불어민주당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오른쪽) 주최로 국회에서 열린 '5G 시대, 가계통신비 부담 어떻게 낮출 것인가?' 토론회에서 참석자들이 토론하고 있다. 연합뉴스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위기 대처법?
시민단체 입장에서는 통신요금이 가계소비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는 점에서 충분히 요금인하 주장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문제가 여의도 정치권으로 흘러들고, 야당의 기업 공격 수단으로 이어지면 정치이슈화하기 십상이다. 야당이 국민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금 부분을 건드렸고, 일정한 인하 성과는 모두 야당 덕이라는 식으로 포장됐다. 경제분야 포퓰리즘의 시초라 봐도 될만 하다.

업계는 최신 휴대폰 판매 때 보조금 지급을 통해 소비자들에게 혜택을 줘온 게 사실이다. 국내 통신서비스 시장은 3개 사업자의 '3자 정립' 구도로 짜여져 보조금 지급이 시장지배력 확장으로 쉽게 이어지지 못한다는 점에서 보조금은 소비시장에 긍정적으로 작용한 부분이 있다. 이런 점들은 가려지고 야당과 시민단체의 통신요금 인하 성과만 부풀려지곤 했다.

사연이 적지 않았던 통신요금이 오랜만에 다시 뉴스의 초점으로 떠올랐다. 통신비 지원이야말로 국민이 체감할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코로나 위기 대처방법'이라 정부·여당이 믿기 때문이다. 2차 재난지원금을 선별 지급하려다 '전국민 지급'이란 정치적 유혹을 못 이겨낸 결과가 '통신비 2만원 지급'이다. 오랜만에 통신요금 이슈의 위력을 다시 느껴보고 싶었을 것이다. 이 수석 말마따나 정부로서도 "많은 고민을 한 결과"인 것은 확실해 보인다.
◆전국민 지급일 뿐, 큰 도움 안돼
당정의 고위급들이 통신비 2만원 지원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하나 빼먹은 게 있다. 바로 가구 구성의 변화다. 이들은 "중학생 이상 자녀를 둔 3~4인 가정은 6만~8만원의 적지 않은 지원 효과를 누릴 수 있다"며 하찮은 액수의 돈이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미 1~2인 가구가 58%에 이르고 있다. 이번 통신비 지원금은 가구 별로 따져도 2만~4만원인 경우가 절반 이상이란 얘기다.

가구 구성의 변화를 모를 리 없는 분들이 자꾸 4인가구 기준으로 지원금이 적지 않고, 국민 부담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냥 모든 국민에게 줬다는 생색을 내고 싶을 뿐인데, 자꾸 금액 규모를 얘기하니 이런 무리한 설명이 따라붙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여권의 '통신비 집착증'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 정치공학과 포퓰리즘의 외피를 입고 부활한 셈이다.

장규호 논설위원 danielc@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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