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드'의 공정 추구했던 역사적 천재, 세종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09-20 08:07   수정 2020-09-20 08:13


역사에서 천재들이 등장할 때 사회는 급변하고, 동 시대의 사람들은 그 덕분에 풍족함과 행복을 누릴 수 있었다.

'역사의 천재’란 어떤 성격과 능력을 갖췄을까. 이들은 머리가 좋고, 시대를 초월하는 통찰력과 현상의 불확실성을 파악하는 지혜를 가졌다. 더불어 모든 사람을 아끼고, 시대와 자연까지 돌보는 마음씨를 가져야 한다. 나아가 타인과 조직을 활용하는 수준을 넘어 스스로 난관을 극복하고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단군, 고주몽, 김춘추, 왕건, 이순신 등은 우리 역사의 천재들이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그러한 기준에 가장 적합한 인물이다.

세종대왕, 이도(李?)는 1397년에 태어나 1418년 6월에 갑자기 세자로 책봉되고, 태종의 선택으로 두 달 만에 4대 임금이 됐다. 피비린내와 풋내를 벗지 못했던 조선은 세종대왕이 즉위한 1418년부터 과로와 당뇨병으로 운명한 1450년까지 32년 동안 질적으로 변신했다. 고려를 없앤 명분과 조선을 존속시킬 힘을 동시에 얻었다.

불가사의하다. 그의 업적들을 보면 한 인물이, 한 시대에 이렇게 의미깊고 다양한 일들을 많이 하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를 역사의 천재로 만들었을 시대상황들, 정책에 참여한 인물들, 업적들을 통해서 그 해답을 찾아본다.

정치인의 관점에서 살펴본다. 첫째, 젊은 임금은 야망과 권력의지를 가진 건국세력을 견제하면서 권력을 자신에게 집중시켰다. 승정원을 강화하고, 도승지(비서실장)에게 힘을 실어줬다. 반대를 무릅쓰고 1420년에 집현전을 설치하여 젊고 실력이 뛰어난 학자들로 신권력집단을 양성했다. 둘째, 성리학을 활용해 ‘성(性)’과 ‘법’, ‘률’로 합리적인 국가 체제의 토대를 완성했다. 귀족, 무신, 권문세족 등 가문에 근거한 고려 후기에 대한 반동이었고, 기득권 세력으로 변질한 건국세력들을 견제하는 정책이었다.

셋째, 건국의 정당성을 세우고, 정치의 명분을 분명히 할 목적으로 이론을 만들고, 역사서들을 편찬했다. 말년인 1445년에는 질병의 고통을 무릅쓴 채 조선의 창업과 가계를 찬양할 목적으로 ‘용비어천가’의 제작에 몰두했다. 『삼국사기』를 애독한 그는 우리 역사의 가치와 조상들의 소중함을 알고, 1443년에는 『자치통감훈의』를 편찬했다. 죽음 직전까지도 『고려사』를 편찬할 것을 강하게 주장했다. 또한 1429년 7월부터 신라, 고구려, 백제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단군과 관련된 기록을 인용하고, 북부여 동부여 등의 역사를 서술한 것은 세종 시대의 인식과 결과물이다. 또 1444년에는 전통역(曆)과 원나라·명나라의 역, 정확한 이슬람역을 참고하여 『칠정산내편』과 『칠정산외편』을 완성했다. 이는 천체의 운행을 정치 행위에 비유해 나라의 자의식을 높이려는 시도였다. 당시 명나라가 알면 심각한 외교문제가 발생할 수 있었다. 이미 즉위 2년인 1420년에 청동활자인 경자자(庚子字)를 만들었고, 1434년에는 갑인자를 제작해 이러한 출판사업들이 발전될 수 있었다.

넷째, 국가의 존립과 발전을 위해 국제질서를 최대한 활용했고, 자주국방에 심혈을 기울였다. 이 무렵 명나라의 3대 영락제는 뛰어난 정복군주로서 주변의 국가들을 군사적으로 정복했다. 1405년부터 환관인 정화를 지휘자로 7차에 걸쳐 해양 원정대를 파견했다. 그 때문에 명나라 중심의 질서에서 탈피할 수 없는 현실을 인정하고, 자주성을 일부 양보하는 대신 정치적인 보장과 무역상의 실리를 선택했다.

세종은 무장인 태조와 태종의 유전 때문인지 국방의 중요성을 인식했고, 군사력 증진에도 노력을 기울였다. 1432년(즉위 14년) 12월에 여진족이 기마병으로 압록강을 넘어 약탈하자 분노한 세종은 이를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다. 작전회의에 참여하면서 직접 전술까지 지시했다. 결국 두만강 유역에 6진, 압록강 유역에 4군을 설치해 발해 멸망 후 불안정했던 이 지역을 안정적인 영토로 삼았다. 남쪽의 백성들을 이주시켜 땅을 개간하는 사민(徙民)정책까지 추진했으나 실패로 끝나 일부 백성들의 원성을 사기도 했다. 또한 13세기 말부터 시작된 왜구가 근절되지 않자, 비록 상왕인 태종의 정책이었지만, 즉위 해인 1419년에는 이종무를 파병해 대마도를 정벌했다. 이어 1426년에는 삼포(부산, 창원, 울산)를 개항했고, 1443년에는 왜인의 출입을 통제하는 정책으로 선회하는 등 강온양면 정책을 구사했다.

세종은 전쟁을 치르면서 군사장비를 만들고, 무기들을 개량했다. 1448년에 신기전이 발명됐는데, 한 번에 15발씩 연속으로 100발을 발사하고, 사거리가 1,000m 이상인 신병기였다. 수레 등으로 운반이 가능한 조립식 대포(총통 완구)를 만들었고, 화포 주조와 화약 사용 방법, 규격 등을 그린 『총통등록』도 발간했다. 해전을 위해 일본인과 유구인의 도움을 받아 개선한 선박들을 한강에서 시험운행했다. ‘충녕대군은 천성이 총민하고, 또 학문에 독실하며 정치하는 방법 등도 잘 안다.’고 했던 태종의 평가처럼, 뛰어난 전제군주라고 볼 수 있지만, 세종은 그 이상의 인물이었다.

다섯째, 세종은 백성들의 생활력을 강화시킬 목적으로 착취경제가 아닌 생산경제의 도입을 시도했다. 정치의 근본은 백성들의 유복한 생활임을 깨닫고, 이를 실천한 인본주의자였다. 농법개량에 노력을 기울여 1429년에는 농사법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농사직설』을 편찬했다. 천문학에 관심이 많았는데, 비록 통치기술로도 활용했지만, 농사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이 강했다. 1433년에는 천체를 관측하는 ‘혼천의’와 해시계인 ‘앙부일구’를, 다음해에는 물시계인 ‘자격루’를 만들었다. 1442년부터는 측우기를 사용해 전국의 강수량을 골고루 측정해 농사에 도움을 줬다. 그는 조세를 감면하는 정책도 다양하게 구사했다. 전국의 토지를 풍흉(豊凶)에 따라 9등급(연분 9등법)으로, 비옥도를 검사해 6등급(전분육등법)으로 나눴고, 20년마다 재측량했다. 이렇게 ‘조세의 공평화’를 도모하는 일은 당연히 대지주들인 신하들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7년 동안 논쟁을 벌인 끝에 즉위 25년째인 1443년에 실시했다. 그 밖에도 도량형을 정비하고, 조선통보라는 금속화폐도 주조했다. 만약 많이 사용됐다면 실물경제와 화폐경제가 활성화되고, 상업이 발달하면서 백성들의 생활이 윤택해지고, 국력도 신장됐을 것이다.

세종은 후생복지 정책에 힘을 기울여 굶는 백성들을 구제하려고 의창을 설치했고, 백성들의 건강과 치료를 위해 ‘혜민서’, ‘활인서’를 설치했으며, 『향약집성방』, 『의방유취』 등의 의학서적도 출판했다. 또한 1430년에는 서열이 엄격한 신분제사회에서 고가의 사유재산인 공노비에게 출산휴가를 주고, 매질하는 사형을 금하는 법까지 제정했다. 시대의 한계를 뛰어넘어 전제군주와 양반들이 지배하는 서열사회의 근간을 흔든 성군이었다. 하지만 그를 역사의 천재로 평가한 것은 또 다른 의미깊은 업적 때문이다.

여섯째, 세종은 지성인들의 말과 성인들의 실천을 국가정책으로 집행하려 노력한 정치가였다. 그는 백성을 시혜나 훈도의 대상을 넘어 기본적으로 평등하고, 삶의 주체가 돼서 존재가치를 구현해야 하는 인간으로 보았다. 때문에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호를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고 판단한 듯하다. 오랫동안 집현전 학자들과 협력해 연구한 끝에 훈민정음을 창제하는 데 성공했다. 3년간의 검증 기간을 거쳐 1446년에 반포한 훈민정음의 해례에 ‘제 의사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백성들을 위해’ 제작한다고 선언했다. 모든 백성이 자기 존재를 과시하고 의사를 표현할 수 있는 ‘기호(code)’를 공평하게 가져야 한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소수의 백성과 여인들은 훈민정음 덕분에 제한적이지만 삶의 주체임을 자각했고, 자기 권리를 요구할 때도 큰 도움을 받았다. 500년이 지나 현대에 들어서면서 훈민정음의 가치는 폭발적으로 빛을 발했다. 한글이 일상화된 덕분으로 감성적이고, 추상적이며, 사변적인 한국문화는 논리적 사고, 수리적 사고, 합리적인 행동에 기초한 사회구조로 변했다. 교조성이 적어지고 실용성이 강해졌다. 한글은 표기방식의 효율성, 신속한 판단과 응용능력 향상에 적합한 기호로 현대 한국을 세계의 선진국으로 끌어올리는데 큰 공을 세웠다.

조선이 건국된 초기는 역동성, 자발적인 창조성을 발현하는 인재들의 시대였다. 세종은 인재들을 발굴하고 키웠으며, 역사의 인물로 만든 인재 중의 인재인 ‘역사의 천재’였다.

난국에 처한 한국. 세종같은 ‘역사의 천재’를 기다리기에는 시급한 상황이니, 우선 그를 흉내 낼 정도의 지도자라도 출현하면 좋으련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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