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단한 현대사 살아낸 '순자들'에 바치는 헌사

입력 2020-09-20 16:50   수정 2020-09-21 00:39

‘소설가의 소설가’라고 불리는 등단 15년차 작가 황정은(44·사진)의 새 연작소설 《연년세세》(창비)가 최근 출간됐다. 지난해 만해문학상 수상작이자 ‘소설가 50인이 뽑은 올해의 소설’에 선정된 연작소설 《디디의 우산》 이후 황 작가가 21개월 만에 내놓은 신작이다.

‘파묘(破墓)’ ‘하고 싶은 말’ ‘무명(無名)’ ‘다가오는 것들’로 이어지는 네 편의 연작소설은 ‘순자’로 불리던 1946년생 이순일과 그의 가족 이야기다. 어머니와 할머니 세대에 가장 흔했던 이름인 수많은 ‘순자’를 떠올리게 한다. 황 작가는 ‘작가의 말’에서 “사는 동안 ‘순자’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자주 만났다. ‘순자가 왜 이렇게 많을까’라는 질문에서 소설을 시작했다”고 썼다.

‘파묘’는 걷기도 불편해진 이순일이 딸 한세진을 데리고 자신의 인생이 시작된 강원 철원군의 외할아버지 묘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이어지는 ‘하고 싶은 말’에선 젊어서는 자녀들을 키우고, 늙어서는 팍팍한 삶을 사는 자녀를 위해 그들의 자녀를 키워야 했던 이순일과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취직해 억척스럽게 살아가는 장녀 한영진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연작소설의 중심은 ‘무명’이다. 외할아버지 곁을 떠나 공부를 가르치겠다는 고모를 따라나섰지만 누구도 오지 않고 만날 수도 없는 집안에 갇혀 식모살이를 해야 했던 열다섯 살 이순일의 모습이 그려진다. 이순일이 ‘내가 여기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없다. 그러니까 누가 안 와’라고 독백하는 장면은 자기 이름이 이순일인 줄 모르고 ‘순자’라고 불리며 존재감 없이 살아야 했던 그의 외로움이 드러난다. 소설은 6·25전쟁과 ‘파독 간호사’로 대표되는 한국의 성장시대에 수많은 무명의 인물을 담아내며 가족, 친구, 사회, 국가 등 여러 관계 안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이들이 온몸으로 부딪치며 살아낸 현대사를 보여준다. 작가는 이순일의 입을 빌려 “잘살기. 그런데 그건 뭐였을까”라고 질문한다. 하지만 답을 내리진 않는다. 이순일은 “내 아이들이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라고 독백한다. 그 시대를 살았던 모든 어머니의 마음을 대변한 듯한 이 혼잣말은 ‘현재를 있게 한 과거를 잊지 말자’는 속삭임으로 들린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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