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벨기에 공주의 '낮은 포복'

입력 2020-09-21 17:52   수정 2020-09-22 00:23

영국에서는 ‘잘난 집안’, ‘좋은 가문’을 비교할 때 군 복무자가 몇이나 되는지를 따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특히 해군 장교들이 있어야 어깨에 힘도 좀 줄 수 있다고 한다. ‘함포외교’를 내세운 옛 대영제국의 위세와 영광이 절로 생긴 게 아니었다. 현 여왕의 남편 필립공도 해군사관학교 출신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 찰스 왕세자와 그의 동생, 아들들도 참전 경험이 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례를 들자면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너무 많아 우열을 가리기 어렵다. 대한민국 역사에서는 유감스런 일이었지만, 마오쩌둥의 아들이 6·25전쟁 때 중공군으로 참전했다가 전사한 것도 그런 것에 포함될 만하다.

러시아에 근대의 기초를 세운 표트르 대제는 신분을 감춘 채 네덜란드 조선소에서 작업공으로 선진 기술을 익힌 것으로 유명하다. 지금 시각으로 보면 ‘국제 위장취업자’ 혹은 ‘원조 산업스파이’다. 위험을 무릅쓴 차르의 모험적 노력이 있었기에 러시아는 함대를 구축하고 새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해 북해로 진출할 수 있었다. 유럽 변방국은 그렇게 제국으로 컸다.

벨기에 공주가 포복 훈련을 받는 한 장의 외신 사진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다시 일깨워준다. 왕위 계승서열 1위의 공주가 육군사관학교에서 1년간 군사훈련을 받는데, 교관의 말에 더 울림이 있다. “공주와 함께하게 돼 영광이지만, 우리는 공주를 다른 생도와 똑같이 대한다.” 거창하게 말끝마다 수십 번씩 ‘공정! 공정!’을 내세울 일도, ‘평등·정의’를 외칠 필요도 없게 하는 말이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 정치적 의도가 있네 없네 하는 뒷담화도 있는 모양이지만, ‘쇼’라도 1년씩 하는 쇼라면 봐줄 만할 것이다.

엄마가 법무장관인 한 청년의 ‘특별한 휴가’ 의혹으로 온 나라가 장기간 떠들썩하다. 검찰이 몇 번째인지도 모를 수사를 다시 하고, 국방부는 ‘추(秋)방부’라는 조롱까지 받고 있다. 어제는 대한민국수호예비역장성단이 “국방부는 정치세력에 휘둘리지 말고, 사실을 신속히 밝혀라”라는 성명도 냈다.

‘황제 휴가’ 논란이 이어지는 이면에는 “군 기강보다 내 자식이 먼저라는 게 장관의 인식인가”라는 다수 국민의 문제의식이 있다. ‘조국 논란’과 ‘추미애 아들 논란’을 연결시킨 ‘한국의 초(超)엘리트 행태·품성론’까지 나온다. 공직이라는 게 이렇듯 무겁고 무섭다. 법과 윤리, 모든 것에서 잣대가 다르다. 이런 ‘작은 시비’가 성가시다면 선출직이든 임명직이든 애초에 공직 근처에 가지 않는 게 좋다.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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