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코로나를 혁신의 기회로 삼는 일본

입력 2020-09-25 17:33   수정 2020-09-26 00:09

2016년 0, 2017년 3회, 2018년 9회, 2019년 53회, 2020년 105회.

지난 5년간 일본의 경제재정운영 기본방침에 ‘디지털’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횟수다. 경제재정운영 기본방침은 일본 정부가 예산안에 반영할 핵심 정책을 압축한 보고서다. 일본 정부는 올해 경제재정운영 기본방침에서 ‘디지털화’를 핵심 정책 중에서도 최우선 순위로 명시했다.

일본 지방자치단체 관공서에는 ‘스구야루과(課)’라는 이름의 부서가 적지 않다. 스구야루는 일본어로 즉시 실행한다는 뜻이다. 부서 간 칸막이 때문에 주민들이 민원 한 통 접수하기 위해 이 부서, 저 부서 뺑뺑이 도는 걸 보다 못한 지바현 마쓰도시 시장이 1969년 부서 이름에 ‘즉시 실행’을 못 박은 게 전국적으로 유행했다.

디지털이라는 단어 사용의 급증이 정책 입안자들의 위기감을 나타낸다면 스구야루과는 실무를 담당하는 공무원 조직이 얼마나 변화에 둔감한지를 보여준다. 정부가 디지털화를 국가 최우선 과제로 정하고 개혁을 재촉해도 정부 부처 간 근거리통신망(LAN)을 통합하는 데 5년을 끌겠다는 게 일본 공무원 조직이다.

암벽 같던 일본의 타성을 쪼갠 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다. 일본 사회 전체가 ‘이번 기회에 낡은 관행과 규제를 불사르고 디지털 혁명의 강을 건너지 못하면 일본은 침몰한다’는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있는 게 느껴진다.

코로나19에 대응해 한시적으로 규제를 푼 일명 ‘코로나 특례’만 보더라도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 모든 환자에게 첫 진료부터 원격진료를 허용한 의료규제 완화가 대표적이다. 일본은 부분적으로 원격의료를 허용해 왔지만 초진의 대면진료를 의무화한 규제만큼은 요지부동이었다. 정부와 의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일본 의사회의 반발이 워낙 거센 탓이다. 하지만 코로나19로 병원에 환자가 몰려들자 의료업계도 반대만 할 수 없게 됐다. 정부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지난 4월부터 ‘코로나19 수습 때까지’라는 조건을 달아 모든 환자의 원격 초진을 허용했다. 새로 들어선 스가 요시히데 총리 내각은 아예 특례조치의 영구화를 밀어붙이고 있다.

‘겸업금지 규정’ 같은 회사 내규에 발목이 잡혔던 부업(副業) 시장도 변했다. 대기업이 먼저 직원들에게 부업을 권장하고, 부업 인재를 모집한다. 직원들은 부업을 통해 코로나19로 줄어든 수입을 만회할 수 있고 기업은 부업인재를 채용해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우수한 인재를 활용할 수 있다. 음식점들의 노천(테라스)영업과 택시의 음식배달 등 코로나를 계기로 한시적으로 허용한 특례조치도 차곡차곡 제도화하고 있다.

경제·사회적인 구조와 사회 구성원의 인식도 바뀌고 있다. 일본도 우리나라와 같이 수도권 인구 집중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새로 들어서는 정권마다 수도권 집중 완화에 사활을 걸었지만 상황은 악화되기만 했다. 2014년에는 수도권 순유입 인구가 10만 명을 넘었고, 올해 도쿄도 인구는 처음 1400만 명을 돌파했다.

하지만 지난 7월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빠져나간 인구가 1996년 이후 처음으로 수도권 전입인구를 초과했다. 대도시에 감염자가 집중되면서 ‘사람은 도쿄로’라는 고정관념이 흔들렸기 때문이다. 재택근무가 정착되면서 20~30대 젊은 세대들이 경치 좋고 물가도 싼 홋카이도, 오키나와, 나가노 등으로 옮겨갔다. 일본 정부와 미디어도 감염과 집값 걱정 없이 일과 가정 모두 충실한 이주 가정의 사례를 집중 부각하는 등 코로나19를 국가 개조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수도 이전’ 같은 극약처방이나 수도에 사는 사람들을 자극하는 정치인들의 발언은 없다.

일본은 코로나19 방역에 성공한 나라로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코로나19라는 대재앙을 100년에 한 번 올까 말까 한 국가개조의 기회로 살리는 데는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세계가 방역의 성공사례로 인정하는 한국은 방역 그 자체만 있을 뿐 ‘코로나 이후’를 대비하는 정부와 정치권의 노력은 찾아보기 힘들다. 거주이전까지 어렵게 만든 부동산대책에 이어 기업의 자유로운 경영활동을 옥죄는 ‘기업규제 3법’까지 도입하려고 한다. ‘K방역’ 성공에 취해 혁신을 서두르지 않을 경우 훗날 ‘코로나19를 잘 막은 게 오히려 국가경쟁력의 발목을 잡았다’고 후회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된다.
부업 있는 日 직장인 744만명
일본에서 코로나19를 계기로 부업에 대한 사회 분위기도 빠르게 변하고 있다. 일손 부족이 심각한 일본은 2018년부터 부업을 ‘원칙 금지’에서 ‘원칙 허용’으로 전환했다.

후생노동성의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부업을 ‘개인이 활약할 수 있는 무대를 넓힐 기회’, ‘기업은 적재적소에 필요한 인재를 고용할 수 있는 형태’로 규정하고 있다. 업무에 지장을 주거나 기업 비밀이 누설되는 경우를 제외하면 근로자가 업무시간 이외의 시간을 어떻게 쓰는지는 개인의 자유라는 법적 근거도 제시했다.

‘겸업금지 규정’ 등 회사 내규를 동원해 직원의 부업을 막았던 기업들도 부업 인재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생활용품 대기업 라이온의 부업인재 모집에는 5명 정원에 1649명이 지원했다. 부업을 갖고 있는 직장인이 744만 명까지 늘었다. 정보기술(IT) 중심이던 부업 시장도 자료 입력, 상품 진열 등 일반 직장인이 접근하기 쉬운 분야로 확대되고 있다.

부업을 장려하는 데 초점을 맞췄던 후생노동성도 올해부터는 근로자를 보호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근로자가 본업과 부업의 노동시간을 따로 신고해 부업이 장시간 노동으로 이어지지 않도록 제도화했다.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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