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된 개천절…하늘을 두려워 않는다 [윤명철의 한국, 한국인 재발견]

입력 2020-09-27 08:00   수정 2020-09-27 08:54


하늘이 열린 날인 개천절(開天節)이 올해로 4353주년을 맞는다.

하늘의 아들인 환웅이 내려와(下降) 땅의 어머니인 웅녀(곰)와 만나 ‘단군왕검’을 낳고, 그 후손들이 신시(神市)에서 ‘홍익인간(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 사상을 펼치면서 뜻깊은 역사의 대장정을 시작한 날이다. 개천절은 원조선·부여·고구려· 백제·신라·가야 등 모든 나라가 다른 이름과 형식으로 기념하고, 전승시켰다. 근대에 들어 민족종교이며 독립전쟁의 산실인 대종교에서 음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정했다. 대종교인이 대부분인 임시정부의 의정원에서 건국 기념일로 제정한 후 해마다 행사를 열었다. 이후 대한민국이 1949년에 양력 10월 3일을 개천절로 제정했다.
왜곡된 개천절…진정한 의의 돌아봐야
정말 궁금하고, 이해하기 힘든 일이 몇 가지 있다. 우리는 반만년의 역사와 단일민족임을 습관적으로 주장한다. 그런데 왜 정체성의 핵심인 개천절이 제정된 과정과 의미, 역할은 물론 일제가 어떻게 왜곡했는지 잘 모를까. 또한 왜곡된 개천절의 뜻을 당연한 듯 여길까?

1905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한민족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천수백년 만에 가장 절박한 상황과 직면했다. 30년 가까이 위정척사, 개화운동, 동학농민혁명을 비롯한 자강운동과 독립협회 결성, 대한제국선포, 애국계몽운동, 의병투쟁과 독립청원 등 다양한 시도가 실패로 끝났다.

일부 선각자와 애국자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장력 등 실력 양성과 강한 결사체 결성이 필요하다는 점을 절감했다. 특히 자의식에 충실한 사상과 신앙이 필요했다. 이런 상황에서 1907년 을사오적을 사살하려는 거사에 실패한 나철은 독립운동의 방략과 새 세상의 모델로 단군의 존재와 원조선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이에 1909년 1월 15일 단군교를 창시했다. 1910년 7월 30일에는 ‘대종교(大倧敎)’라고 이름을 바꿔 공표한 후 독립전쟁의 구심체로 개편했다(김동환, 《이달의 문화인물-나철》). 1910년 대한제국이 끝내 멸망하자 민족운동 세력은 대거 압록강과 두만강을 넘어갔다. 만주는 독립전쟁을 벌이기에 전략적으로 가치가 높았고, 원조선·고구려·발해의 땅이었다는 역사적인 연고는 새 나라를 건설하는 명분과 자신감, 에너지를 줄 수 있었다.
전기 독립전쟁의 주역 '대종교'

질적으로 변신한 독립운동은 1920년대 말까지는 몇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첫째, 실제 행위는 매우 전투적이었으나 궁극적인 지향은 우리 민족뿐 만 아니라 모든 사람의 평화와 공존이었다.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선언서’가 발표됐고, 전국적으로 3.1 저항운동이 일어나는 전기가 마련됐다. 아쉬운 점은 ‘독립’이라는 단어가 빠졌고, 일제가 사용을 금지한 ‘대한’ 대신 ‘조선’을 사용한 점, 오직 평화운동을 표방한 점이다. 주도한 사람들도 독립전쟁의 중심에서 벗어났으며, 천도교·기독교·불교도들이었다. 그러나 앞서 1919년 1월 10일, 무오년에 발표한 ‘대한독립선언서’는 ‘대한독립’을 제목에 명기했고, ‘대한민주’ ‘한남한여‘등 자주적인 용어를 사용했다. 독립전쟁에 참여 중인 39명이 서명한 만치 내용에도 적극적인 항전을 추구했고, 끝부분에는 ‘육탄혈전’으로 독립을 완성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하늘의 뜻과 사람의 도리(天意人道), 정의와 법리(正義法理)를 주장했고, 국제 불의를 감독하고 우주의 진선미를 체현(體現)해 대한민족이 시대에 부응하고 부활해야 한다는 ‘공존의 역할론’까지 주장했다. 또한 건국(立國)의 기치를 ‘~ 동등한 권리와 부를 모든 동포(一切同胞)에게 베풀며 ~사해인류(四海人類)를 포용(度)하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단군신화의 논리와 홍익인간의 사상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임시정부가 건국강령으로 채택한 조소앙의 삼균주의 등은 완전한 균등과 사해일가를 이룩하는 사상이었다.

둘째, 이 시대의 독립운동은 주체의 대부분이 대종교인들이었고, 대종교의 조직을 최대한 활용했다. 서간도에는 1911년에 고구려의 첫수도로 알려진 환인에 대종교인 윤세복 형제가 동창학교를 세우고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 학교에서 윤세복과 김교헌의 영향을 받아 역사를 연구하고 조선사(훗날 《조선상고사》)를 비롯한 명저를 낸 박은식과 신채호가 대종교인이었다. 그리고 잠시 동안 국어를 가르친 이극로 역시 같았다. 1911년 통화 지역에 이회영 등 6형제와 이상룡 등이 도착해 경학사를 세웠다. 경학사는 신흥강습소를 거쳐 신흥무관학교로 변신해 무려 3500명 이상의 독립군을 양성했다. 이들은 고구려의 수도권 일대에서 전투를 벌였다. 훗날 청산리 전투에서 대승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의 대한의용군은 대다수가 대종교인이었다(박영석, 《만주 노령지역의 독립운동》).

동간도에는 한때 발해의 수도였던 화룡현을 중심으로 독립군들이 활동했다. 청파호 옆에는 나철이 대종교 본사를 세운 후 독립전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했다. 이후 발해농장을 운영하면서 임시정부와 독립운동의 활동자금을 공급하다가 고문으로 순국한 안희제도 대종교인이었다.

한편, 19세기 말부터 두만강 너머 연해주인 핫산·블라디보스토크·우수리스크 등에서 국내진공 작전 등을 지휘했고, 안중근 의사의 거사를 지원한 이상설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국내에서는 3대 총독으로 부임하는 사이토 마코토에게 폭탄을 투척했다가 사형당한 강우규 열사, 천연두 예방법을 소개한 한글학자였던 지석영 선생, 신간회 운동을 주도한 동시에 임꺽정의 작가인 홍명희, ‘한글’이란 말을 만든 주시경 선생과 제자인 김두봉·최현배 등도 대종교인이었다. 1942년에 발생한 ‘조선어학회 사건’은 대종교 교주인 윤세복이 이극로에게 ‘단군성가’를 자곡해줄 것을 부탁한 내용이 발각되면서 빚어진 사건이다.

또 식민사학자들과 맞서 우리 역사를 연구한 장도빈·안재홍·정인보 등의 역사학자들과 언론인들, 아리랑 작곡가인 나운규, 조소앙·이시영·신규식·김규식·이동녕 등의 정치인들도 대종교인이었다. 심지어는 기독교인인 이승만과 안창호 등도 단군의 중요성을 실감했다.

이에 일본은 대종교가 창시될 때부터 위험세력으로 판단했다. 1915년 일본이 총독부령으로 ‘종교 통제안’을 공표할 당시에는 대종교를 ‘종교를 빙자한 ‘독립운동 단체’라고 허가를 취소하고 탄압했다. 나철은 1916년 음력 8월 한가위 구월산 삼성사에서 자진 순국했다.
독립운동에서 중요했던 단군과 고대 역사들

셋째, 독립운동은 공산주의가 확산하기 전까지는 민족의 정체성을 중시해 단군을 구심점으로 뭉쳤다. 이에 단군과 원조선·고구려 역사를 중요시했다. 나철과 신채호의 대화를 보면 역사의 중요성을 매우 강조하고, 우리의 혼을 단군이라고까지 했다. 조소앙(김교헌 설도 있다.)이 작성한 것으로 알려진 대한독립선언서에는 ‘우리 단군대황조께서 상제(上帝)에 좌우하시어 우리의 기운(機運)을 명하시며, 세계와 시대가 우리의 복리를 돕는다.’ 라는 표현도 있다. 또한 민족세력들은 일본에 대항하고, 중국(淸·漢)의 속방의식에서 탈피하려면 성리학이나 서구사상, 일본의 논리가 아닌 전통사상이 필요하다고 인식했다. 그래서 ‘단군신화’,‘홍익인간’ 등을 중요시했고, ‘천인합응’의 논리, ‘대동사상’ ‘삼균주의’, 심지어는 무정부주의조차 수용했다.

일본인들, 일부 지식인들과 종교인들은 단군은 허구의 존재이고, 추상적이라고 왜곡했다. 이에 세뇌당한 우리는 현재까지도 그렇게 알고 있다. 더욱이 근래에는 문명의 본질과 우리 역사에 대한 무지, 민족주의의 오해, 일부 종교의 영향 등으로 단군의 존재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해졌다. 원조선의 실체와 함께 개천절의 의미도 점점 더 퇴색되고 있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그렇지 않다. 한민족이 처한 최대의 위기상황 속에서 독립전쟁에 생명을 바치며 시대정신에 가장 충실한 삶을 산 이들은 단군을 우러르는 인물들이었다. 그들이 추구한 목표는 홍익인간, 한민족의 정체성이 구현된 진보된 세상이었다. 독립군의 독립선언서와 다물단의 조직은 긍정적인 역사를 재생 반복해 새 세상을 창조(re-foundation)하려는 의지의 구현이었다(윤명철, 《단군신화, 또 다른 해석》).

올해의 개천절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할까?

계속되는 내우외환으로 국난에 처한 상황이다.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추세이다. 역사에서 한 집단의 흥망성쇠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따라서 질적으로 쇄신할 필요가 있을 때는 치명적이지 않은 상처와 붕괴 직전의 위기를 체험하는 기회가 필요할 수도 있다. 하지만 대책 없이 시대의 희생자가 될 수는 없지 않은가? 가능한 혼신을 다 바쳐 극복해야 한다. 해결의 방략과 모델, 강한 의지와 자신감을 독립군들처럼 우리 역사와 단군에서 찾는 것은 어떨까.

윤명철 < 동국대 명예교수·우즈베키스탄 국립 사마르칸트대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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