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프로 긁어 쓴 일필휘지…"단색조 회화에 서체를 끌어들였죠"

입력 2020-10-14 17:51   수정 2020-10-15 06:45


“큰 용기가 필요했어요. ‘단색화’를 하는 사람들의 곱지 않은 눈길을 받아내야 했으니까요. ‘여기서 벗어나면 설 땅이 없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컸죠. 그러나 집단의 일원으로 단색화를 하기보다 독자적으로 가자고 단단히 마음먹고 시작했죠.”

14일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개인전 ‘1990년대 단색조 회화-서체(書體)를 끌어들이다’를 시작한 이정지 화백(79)의 회고다. 1990년대는 그에게 크나큰 변화의 시기였다. 1972년 신세계화랑에서 첫 번째 개인전을 연 그의 초기 작업은 특정한 형태가 드러나지 않는 비구상의 화면을 구축했다. 1980년대엔 물감의 축적과 나이프를 이용한 긁기의 반복으로 단색조 회화를 만들었다. 잘나가고 있는 ‘단색화가’ 그룹으로 분류됐던 시기다.

하지만 그는 1990년대 들어 ‘단색화’ 그룹에 편입되기를 거부하고 독자 노선을 걸었다. 단색조 화면을 유지하되 거기에 한자 서예의 글씨를 도입한 것.

평소 붓글씨를 즐겨 써온 그는 안진경체와 추사체를 바탕으로 화면에 서체를 끌어들였다. 서예와 다른 점은 붓 대신 팔레트 나이프를 이용해 유화물감을 긁어내 글씨를 만든다는 것. ‘정신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고유무상생(故有無相生)’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 ‘고장난명(孤掌難鳴)’ 등 가훈이나 좌우명, 한옥에 붙어 있던 주련 글씨 등을 새겨넣지만 글자를 뚜렷이 알아보기는 어렵다. 내용보다는 획과 획이 만나고 결합할 때 나타나는 조형성에 집중해서다.

작업 과정은 지난하다. 그의 작품에서 긁어쓰기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밑작업이다. 그는 나이프로 한자를 긁어쓰기 전에 기초 다지기부터 철저히 한다. 캔버스 바탕에 젯소부터 바르는 일반적인 유화 제작 과정과 달리 그는 다양한 색조로 유화물감을 중첩해 쌓아 바탕을 다진다.

화면은 일률적으로 촘촘히 메우지 않고 불규칙한 붓질로 직조하듯이 채워 나간다. 그 위에는 방사형 선이나 오선 등의 규칙적인 선을 질서정연하게 그어 불규칙한 붓터치를 보완한다. 화면에 불규칙한 간격을 두는 것은 물감이 숨 쉴 공간을 주기 위해서다. 이렇게 하면 오랜 시간이 지나도 화면에 균열이 생기지 않는다고 한다. 그 위에 단색조 물감을 발라 전체 화면의 색조를 정한다. 이 화백만의 독특한 마티에르는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나이프로 글씨를 새기는 것은 작업의 하이라이트다. 오랜 노력과 기다림 끝에 찾아온 화룡점정(畵龍點睛)의 순간과도 같다. 이 순간을 위해 그는 밑작업을 다지고, 물감이 적당히 마르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신체적·정신적 컨디션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나이프로 속도감 있게 긁어서 글씨를 쓰려면 고도의 정신집중과 체력이 필요해서다. 일필휘지로 글씨를 쓰듯 나이프로 긁는 작업을 마치고 나면 온몸의 기운이 다 빠진 느낌이라고 한다.

이렇게 완성한 작품에서는 갈색이나 먹색, 녹색 톤의 바탕에 글씨 부분은 흰색으로 드러나 독특한 느낌을 준다. 오래된 비석의 탁본 같기도 하고, 금석문을 보는 것 같기도 하다. 녹색톤 바탕에 세로로 선을 긋고 글씨를 긁어낸 작품은 대밭을 연상하게도 한다.

이번 전시에는 이 화백의 1990년대 작품을 중심으로 근작들을 포함해 35점을 걸었다. 전시장 벽을 가득 채우는 대작이 많다. 그는 “작업장 구석에 쌓아뒀던 작품들을 30년 만에 꺼내 보니 그간 잘 발효됐다”며 “밑작업을 잘해서 그림들이 숨을 쉴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뿌듯해했다.

1990년대 이후에도 그의 작품은 변화를 거듭해왔다. “변해야 사는 체질”이라는 그는 “내 작품에는 자기복제가 단 한 점도 없다”고 단언한다. 단색조를 유지하면서도 오선지를 차용하거나, 프랑스어 벽(mur)과 길(rue)을 더해서 만든 ‘MUUE’, 성경이나 라틴어 구절 등이 등장하기도 한다. 지난 3월 22일 세계 물의 날에 그린 'O-322(물로부터)'는 이례적으로 흰색 바탕에 오선을 긋고 성경 시편의 구절 'DE PROFUDIS'(심연에서)를 써놓았다. 갈색 톤으로 밑작업을 한 한지에 먹으로 ‘mur’과 ‘rue’를 쓴 신작도 선보였다.

수행과도 같은 자기 절제와 온축, 준비와 기다림이 필요한 작업을 지속하는 이 화백의 삶 또한 구도자 같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오전 6시에 일어나 묵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하루 한 시간가량 글씨를 쓰고, 책을 읽는다. 서예가가 글씨를 쓰기 전에 먹을 갈듯, 그는 이렇게 작품을 위해 스스로 준비하고 다진다. 올해 한국 나이로 여든이 된 그는 “귀가 좀 안 들리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림을 못 그리겠느냐. 죽을 때까지 내 마음대로 재미있게 그릴 것”이라고 노익장을 과시했다. 전시는 다음달 3일까지.

서화동 선임기자 fireboy@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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