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의 '조직적 증거 인멸' 충격…감사원 원전 보고서 해부

입력 2020-10-21 10:01   수정 2020-10-21 10:55


지난 20일 나온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의 타당성 점검’ 감사결과에 나타난 산업부 공무원 등 탈(脫)원전 관계자들의 행동은 '조직적 화이트칼라 범죄'를 방불케 한다. 각종 지시 중 상당수는 문서가 아니라 구두로 이뤄졌다. 그나마 남아있던 증거는 감사 전날 새벽 복구가 최대한 어려운 방식으로 대량 삭제했다. 관련자들은 막판 진술을 뒤집어 가며 책임 소재를 교묘하게 회피했다. 문제의 핵심인 '경제성 조작'에 대한 실질적인 징계는 아무도 받지 않았고, 감사원의 수사 의뢰도 없었던 데는 이런 점도 적용했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200쪽에 달하는 감사원 보고서 곳곳에는 이들의 '문제적 행동'이 진술 등을 통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 협박성 발언 등 관계자들에게 가한 압박과 조직적인 증거 인멸 등은 일반 상식으로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각하다는 평가다. 청와대의 개입을 의심케 하는 대목도 있다. 사건을 재구성해 관련 문제점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①새벽의 '대량 증거인멸', 4분의 1은 끝내 복구 못해
"감사원이 월성 1호기 조기폐쇄에 대한 감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A 산업부 서기관)
"당시 컴퓨터, 이메일과 휴대폰에 저장된 월성 1호기 관련 문서를 전부 삭제하세요."(B 산업부 국장)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업무를 수행했던 A 서기관은 지난해 12월 담당 국장이었던 B 국장의 지시를 받고 444개에 달하는 파일(122개 폴더)를 삭제했다. 감사원의 디지털 포렌식에도 이 중 120개 파일은 끝내 복구되지 않았다. 최재형 감사원장이 국회 국정감사에서 "이렇게 감사 저항이 심한 감사는 재임하는 동안 처음이었다"고 말한 대로다.

대대적인 자료 삭제는 12월 1일 일요일 밤에 이뤄졌다. 다음날인 2일 감사원의 추가 자료제출 요구가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는 이유에서다. A서기관은 1일 밤 11시 24분 36초부터 다음날 새벽 1시 16분 30초까지 정부세종청사 산업부 사무실로 들어가 컴퓨터에서 관련 파일 444건을 삭제했다. A서기관은 감사원 조사 과정에서 "삭제 후 복구가 어렵도록 파일명을 수정해 다시 저장 후 삭제하는 방법 등을 썼다"고 진술했다. 이로 인해 444건 중 120건은 감사원의 포렌식에도 끝내 복구되지 않았다.

A서기관과 B국장의 이런 조치에는 산업부 부처 차원의 암묵적인 동조가 있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산업부는 지난해 11월 감사원으로부터 관련 보고자료 및 협의자료 일체를 요구받자 이 중 일부 자료만 제출하고, 청와대에 보고한 문서 등 대부분의 문서를 누락했다.

주목할 만한 점은 감사원 감사 초기 "정말 짧은 생각이었고 깊이 반성한다"던 B국장이 지난 9월 진술한 내용을 번복했다는 점이다. 그는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자료는 각자 정리하는 게 좋겠다고 얘기했을 뿐, 자료 삭제를 지시한 적이 없다"고 기존 진술을 뒤집었다. 이는 부하 직원인 A서기관의 "B국장 지시가 없었다면 삭제까지는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증언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② 관련자 징계 없지만, 짙은 '청와대 그림자'

감사원 보고서에는 청와대가 직접 월성 1호기를 즉시 가동중단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 없다. 하지만 문재인 대통령이 월성 1호기 폐로 일정을 묻고, 청와대 비서실이 계속 현황을 보고받는 등 이 사안에 대해 청와대가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명확히 드러난다. 직접적인 물증이 없을 뿐 청와대도 월성 1호기 조기 폐로 및 즉시 가동중단의 책임이 있거나, 최소한 이를 방조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청와대의 영향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 대목은 백운규 전 산업부 장관이 “월성 원자력발전소 1호기의 영구 가동중단은 언제 결정되냐”는 문재인 대통령의 발언을 들은 뒤 '즉시 가동중단' 지시를 내렸다는 곳이다. 2018년 4월 3일 산업부 C과장은 전날 청와대의 한 행정관에게 들은 문 대통령의 발언을 백운규 당시 산업부 장관에게 보고했다. 청와대의 한 보좌관이 월성 1호기를 갔다가 “원전 외벽에 철근이 노출됐다”고 청와대 내부보고망에 보고했고, 이를 본 문 대통령이 질문을 했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감사원 보고서에는 문 대통령의 발언을 들은 백 전 장관은 곧바로 “한수원 이사회가 (월성 1호기) 폐쇄를 한 다음에도 원전을 계속 돌리는 게 이상하지 않느냐"며 "청와대에 그렇게 보고 못 하니, 즉시 가동을 멈추는 쪽으로 재검토하라"고 질책했다고 돼 있다. 기존에 산업부가 작성한 ‘월성 1호기 조기폐쇄 추진방안 및 향후 계획’ 보고서에는 한수원 이사회가 폐쇄 결정을 하더라도 월성 1호기를 즉시 가동중단하는 것보다 2년 더 운영하는 것이 경제성이 있다고 돼 있었다. 하지만 백 전 장관의 발언으로 산업부는 즉시 가동중단으로 방침을 확정했다.

감사 막판 B국장 등 관련자들이 일제히 기존 진술을 번복하고, 지난 20일 감사원 발표 직후 산업부가 "감사원 감사에 불복한다"는 입장을 내놓은 데도 청와대 의중이 반영됐다는 해석이 많다. 감사 대상 부처가 감사원 조사를 받은 직후 주요 지적사항을 모두 부정하는 건 이례적이다. 관가의 한 관계자는 “생각보다 징계 수위가 약했는데도 산업부가 강력 반발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며 “산업부가 스스로 결정해 내놓은 입장이 아니라 청와대의 강경 대응 지시에 따라 작성된 문안일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③ 한수원 직원 협박·회계법인은 압박
한수원은 월성 1호기를 조기 폐쇄하고 즉시 가동을 멈추는 데 회의적인 입장이었다. 최소 수천억원대의 손실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명백해서다.

산업부는 폐쇄 결정을 주저하는 한수원을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일종의 협박도 동원됐다. 2018년 3월 2일 산업부 C과장은 한수원 관계자에게 “문 대통령의 탈원전 선언 1주년 이전에 의사 결정을 해야 한다”며 “산업부에서도 관심이 많은데 한수원 직원들이 인사상 피해가 없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는 애기다.

여전히 한수원이 주저하자 산업부는 청와대를 언급하며 압박 수위를 높였다. 한수원 측에 월성 1호기 조기 폐쇄 결정 시한까지 통보한다. C과장은 한수원에 “대통령 비서실에서 6월 19일 탈원전 선포 1주년 행사와 관련해 민감하게 지켜보고 있다"며 "3월 말까지 내부 방침을 결정해 보고하기 바란다”고 했다. 한수원 이사회는 서둘러 월성 1호기를 조기 폐쇄해 한수원이 손해를 보는 게 배임에 해당하는지 법률 검토를 하는 등 '안전판'을 서둘러 마련한 뒤 방침에 따랐다.

산업부는 이어 "월성 1호기를 돌릴수록 손해를 본다"는 결론을 짜맞추기 위해 경제성 평가를 맡은 삼덕회계법인에 압력을 가했다. 월성 1호기가 고장 등으로 수시로 멈추는 데다, 원전으로 생산한 전기가 헐값에 팔린다고 가정하라는 요청이었다. 이에 따라 회계법인은 산업부가 원하는 결론이 나올 때까지 가정을 계속 바꿨다. 원자력 전기의 판매 단가를 kWh당 60.76원에서 51.52원으로 낮추고, 가동률도 산업부·한수원과 회의를 거듭하며 85→70→60%로 내린 게 대표적이다.

회계법인 담당자가 한수원 직원에게 “합리적인 평가가 아니라 정부가 원하는 결과를 맞추기 위한 작업인 것 같아 기분이 씁쓸하다”고 토로할 정도로 압박은 노골적이었다. 한수원 이사회는 6월 이렇게 조작된 결과를 근거로 월성 1호기를 조기 폐쇄키로 결정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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