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스톱 익스체인지'된 날, 오사카는 멀쩡했던 이유 [정영효의 일본산업 분석]

입력 2020-10-22 08:27   수정 2020-10-22 10:30



지난 1일 세계 3대 증권거래소인 도쿄증권거래소가 시스템 장애를 일으켜 상장사 3724곳의 거래가 온종일 중단됐다. 미국과 영국의 주식시장도 시스템 장애로 중단되는 사례가 없지 않지만 선진국 증시에서 전 종목의 거래가 온 종일 중단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똑같은 사고 반복…매뉴얼사회 약점 노출
도쿄거래소의 슬로건인 '네버 스톱(Never Stop·어떠한 상황에서도 시장이 운영된다는 의미)'을 꼬아 '도쿄 스톱 익스체인지(Tokyo Stop Exchage)'라는 비아냥이 잇따랐다. 때마침 일본은 홍콩 국가보안법 시행으로 홍콩을 떠나려는 글로벌 금융회사와 금융인재를 유치해 도쿄를 국제금융허브로 키우려 하고 있다. "금융시장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증권거래소에 대한 신뢰가 훼손되면 일본 정부가 구상하는 도쿄금융허브 전략도 멀어질 수 밖에 없다"(요미우리신문)는 언론의 비판이 이어졌다.

도쿄증시가 완전히 마비된 건 상장 종목들의 주가를 증권사의 거래화면에 실시간으로 내보내는 도쿄거래소의 서버가 장애를 일으켰기 때문이다. 서버에 장애가 발생하면 즉각 예비 서버와 자동으로 교체되도록 설정돼 있었지만 어찌된 일인지 '자동 백업'이 이뤄지지 않았다.

도쿄거래소가 더욱 얼굴을 들지 못하는 건 2012년 2월에도 똑같은 장애를 일으킨 전례가 있어서다. 이 때는 오전 동안 240여 종목의 거래가 중단됐다. 도쿄거래소는 후지쓰가 개발한 애로헤드(화살촉이라는 듯)라는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다. 이미 한 차례 사고를 쳤는데도 문제를 해결하기는 커녕 오히려 더 큰 사고를 내면서 후지쓰의 시스템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이 커지고 있다.

매뉴얼(교본)이 없으면 아무 것도 못하는 일본 조직의 문제 또한 여지없이 노출됐다. 자동 백업 기능이 망가진 서버를 수동으로 교체했더라면 늦어도 당일 오후부터는 시장을 재가동할 수도 있었다. 문제는 매뉴얼이었다. 도쿄거래소의 긴급상황 대응계획(컨틴전시플랜)에는 '예비 서버가 자동으로 백업되지 않으면 거래를 중단한다'는 매뉴얼은 있었다. 도쿄거래소가 개장 전 거래중단을 결정한 것도 이 매뉴얼에 따른 것이었다. 문제는 거래를 중단하는 매뉴얼은 있어도 재가동에 대한 매뉴얼이 없었다는 점이었다.

결국 도쿄거래소는 증권사들과 협의해 '시장을 재가동하면 오늘 아침 거래정지 이전에 접수받은 주문을 처리하기가 어려워지니 종일 거래를 중단하고 이날 거래는 없는 것으로 한다'고 결론내렸다. 이날 개장 전 투자자들이 낸 사전주문은 3000억엔(약 3조3000억원) 규모였다. 주문을 실효 처리하면서 거래소는 주문을 낸 일반 투자가들에게는 의견을 묻지도 않았고 온 종일 제대로 된 설명조차 없었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지적했다.
◇세계 최초 조직화된 파생상품거래소
도쿄증시가 휘청거리면서 새삼 주목을 받은 곳이 오사카거래소다. 도쿄와 같은 시스템을 쓰는 나고야, 삿포로, 후쿠오카거래소가 모두 마비된 반면 오사카거래소만은 정상적으로 거래가 진행됐다. 도쿄거래소와 다른 시스템을 채용한 덕분인데 오사카거래소가 도쿄와 다른 길을 걷기까지는 이보다 심오한 역사적인 배경이 있다는 설명이다.

2013년 도쿄증권거래소는 오사카증권거래소와 통합해 일본증권거래소그룹(JPX)을 출범시켰다. 도쿄거래소는 오사카거래소로부터 상장 주식 1100곳을 넘겨받는 대신 주식선물과 같은 파생상품을 넘겨줬다. 오사카거래소는 지난 7월 도쿄상품거래소로부터 금과 고무, 옥수수 상품선물을 추가로 이관받아 파생상품 거래기능을 한층 강화했다. '현물의 도쿄, 선물의 오사카' 구도가 성립된 것이다.

도쿄거래소에 시장 기능을 집중시킨 건 전세계 증권거래소의 몸집 불리기 경쟁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는 결정이었다. 그 와중에 오사카가 선물거래소를 물려받은 것은 간사이 지방의 오랜 상거래 전통과 인연이 깊다는 설명이다. 에도시대 다이묘(지방 영주)들은 연공으로 받은 쌀을 '일본의 부엌'으로 불렸던 오사카로 보내 현금화했다. 당시 거래방식은 현물거래가 아니었다. 풍년이냐 흉년이냐에 따라 쌀값이 요동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다이묘들은 쌀 상인들과 수확 전에 매매가격을 정해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선물거래가 활발하게 이뤄졌던 것이다.

1730년 에도막부(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일본을 통일하고 지금의 도쿄인 에도에 수립한 무사정권. 1603~1867년)는 쌀 거래가 가장 활발했던 도지마쌀시장을 공인했다. '세계 최초의 조직화된 파생상품거래소'의 탄생이다.

오랜 역사에 비해 일본 파생상품 시장의 존재감은 크지 않다. 올 상반기 시장 규모는 4조4000억달러(거래소 매매 기준)로 2002년에 비해 90% 가량 감소했다. 우리나라가 전세계 파생상품 시장에서 압도적인 1위를 달리는 것과 대조적이다. 일본에서 파생상품 시장이 위축되는건 선물을 투기로 보는 인식 때문으로 분석된다.

미리 정한 가격으로 나중에 값을 치르는 선물거래는 간사이의 후불식 문화와도 관계가 있다. 간사이 지방의 후불식 전통은 최소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오사카 상인들과 단골들의 거래는 보통 외상이었다. 상인들은 연 2회 외상값을 회수했다. 이 전통이 오늘날까지 남아 간사이 사람들 사이에서는 간단한 식사부터 복잡한 거래까지 '상거래는 후불'이라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다는 설명이다.
◇성미 급한 간사이인의 '후불 문화'
간사이지역의 충전식 교통카드 피타파는 일본 전국에서 사용되는 10종류의 교통카드 가운데 유일하게 후불식이다. 도쿄에서는 전철이나 버스를 탈 때 미리 기본요금 이상을 충전해 두지 않으면 개찰구를 통과할 수 없다. 반면 간사이지역에서는 카드에 1엔만 남아있어도 개찰구를 통과할 수 있다. 개찰구를 나갈때 잔액을 결제하는 후불식이기 때문이다.

일단 타고 내릴 때 모자라는 금액을 정산기로 정산하는 식인데 간사이 사람들의 급한 성미를 감안한 시스템이라는게 이 지역 사람들의 자체분석이다. 선불식 교통카드라면 잔액이 부족할 때 전차를 타기 전에 충전해야 한다. 간사이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는 통근·통학 시간대에 진득하게 줄 서서 충전하는 걸 참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사카, 교토, 고베 등 간사이 주요도시의 노선버스는 승차구간과 관계없이 요금이 똑같아도 하차할 때 운임을 치르는 경우가 많다. 1951년 오사카시가 일부 노선을 선불식으로 변경했다가 "서비스가 끝나기도 전에 돈을 받는 것은 갑질 아니냐"는 승객들의 항의를 받고 후불식으로 되돌린 역사도 있다. 작년 가을 교토시 버스가 넘치는 관광객 때문에 하차시 혼잡에 시달리다 못해 50여년 가까이 고수해온 후불식을 포기한 것이 이 지역에서는 대단한 뉴스였다.

선불식인 전자화폐의 보급률도 간사이는 전국 꼴찌 수준이다. 신용카드 회사 JCB의 2018년 조사에서 간사이 지역의 전자화폐 보급률은 63.0%로 수도권보다 16.6%포인트 낮았다. 전국 평균인 70.3%에도 못미쳤다. 신용카드는 후불식이니까 간사이 지역에서 잘 먹힐 것 같지만 의외로 보급률이 낮은 편이다. 카드회사 간부는 요미우리신문에 "3~5%의 결제수수료를 무느니 그만큼 가격을 낮추는 편이 손님에게도 이득이라고 생각하는 상점주들의 저항이 강하다"고 말했다.

도쿄=정영효 특파원 hug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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