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흥길 작가 "살인의 문학 아닌 활인의 문학 하라는 박경리 작가 뜻 받들겠다"

입력 2020-10-22 17:27   수정 2020-10-22 17:29



“제 졸작인 소설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속 인물 권씨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나 이래 봬도 안동 권씨요, 나 이래뵈도 대학나온 사랍이요’였어요. 이제 제가 권씨를 흉내내 ‘제가 이래 봬도 박경리문학상 수상작가입니다’라고 얘기할 수 있게 됐네요.”

2020년 제10회 박경리문학상 수상자인 윤흥길 작가(78·사진)가 22일 이같이 말했다. 이날 강원도 원주시 토지문화관 대강당에서 열린 '박경리문학상 수상작가 온라인 기자간담회'에서 윤 작가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殺人)의 문학이 아닌 사람을 살리는 활인(活人)의 문학을 하라는 박경리 선생의 가르침을 내 작품 속에 잘 담아내겠다"고 말했다.

박경리문학상은 가장 인간적이면서 순수한, 또 고집스런 작가정신을 지닌 이 시대 작가다운 작가에게 주어지는 상이다. 2011년 제정돼 올해로 10명의 수상자를 냈다. 상금은 1억원. 매년 노벨 문학상 수상후보로 거론되는 러시아 작가 류드밀라 울리츠카야(2회), 미국작가 메릴린 로빈슨(3회), 케냐작가 응구기 와 시옹오(6회) 등 걸출한 해외 작가들이 이 상을 수여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최종 본심에는 서정인, 황석영, 윤흥길 등 한국 작가 3명, 나이지리아 작가 벤 오크리와 미국 작가 조너선 프랭크 등 총 5명이 경합을 벌였다. 1회 수상자인 최인훈 작가 이후 한국작가로는 윤 작가가 두번째 수상이다.

1942년생 전북 정읍 출신인 윤 작가는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서 단편소설 '회색 면류관의 계절'로 등단했다. 1973년 외할머니와 친할머니의 두 아들이 각각 국군과 인민군에 가담해 맞서는 동족상잔의 아픔과 함께 감동적 화해를 그린 단편소설 '장마'를 발표해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장마'는 2000년 이후 고등학교 국정교과서에 실리면서 윤 작가의 이름을 크게 알린 작품이기도 하다.

1970년대 들어선 산업화 과정에서 드러나는 노동계급의 소외와 갈등 문제를 형상화한 《아홉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직선과 곡선》《창백한 중년》등의 연작을 발표했다. 1980년대 발표한 《완장》에선 권력의 생태에 대한 비판의식을 풍자와 해학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문학인생 52년을 돌아보면서 그가 생각한 대표작이 있을까. "작가가 하는 말 중 가장 건방진 말이 '내 대표작은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는 말이에요. 저도 건방 좀 떨고 싶네요. 아직 안나왔어요. 하지만 현재 3권까지 내놓은《문신》(문학동네)이 완간되고 나면 제 대표작이라고 꼽을만 할거 같습니다. 박경리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아서 처음 시작한 작품이라 애착이 갑니다."

그가 대표작으로 꼽은《문신》은 '큰 작품을 쓰라'는 박경리 작가의 가르침을 받아 시작됐다. 윤 작가는 "그 시절 큰 작품에 대한 성격을《토지》처럼 분량이 방대하고 규모가 큰 작품으로만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그래서인지 장편 3부작으로 시작했음에도 1부에서부터 자신이 없었다고도 했다. 연재하려던 문학잡지가 폐간돼 연재가 끊기면서 생업을 위해 집필을 중단하기도 했었다. "그만큼 수난도 풍파도 많은 작품이에요. 그 시간을 지나오면서 박경리 선생이 말한 큰 작품은 '인간이나 인생에 대해 얼마나 진지하게 성찰하고 그것을 치열하게 작품으로 다루는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 외에 윤 작가가 특별히 애착을 갖는 작품이 있을까. 그는 주저없이 2004년 발표해 대산문학상을 수상한《소라단 가는 길》을 꼽았다. 윤 작가는 "주인공들이 각 편마다 다 다른데 6·25 전쟁 등 제가 겪었던 체험들을 자전적으로 풀어넣은 제 분신들"이라며 "사람들의 주목은 받지 못했지만 그래서인지 못난 자식 챙기는 부모 심정으로 보게 된다"고 말했다.



원로 작가로서 윤 작가는 후배 작가들에게 "젊을 때부터 운동을 많이해 체력을 키우라"고 말했다. "소설 쓰는 사람에겐 중요한 얘기에요. 한국문학에서 지금까지 장르문학이 자리를 못잡고 있는 큰 원인 중 하나가 체력이 달려서에요. 그렇게 일찍 팬을 놓는 분이 많다고 합니다. 체력을 키우면 나이들어서도 작품을 꾸준히 쓸 수 있다는 걸 제 실제 경험을 통해 많이 느끼고 있어요."

실제로 윤 작가 역시 지병인 심혈관 질환이 악화돼 장기간 치료를 받기도 했다. 하루 꼬박 새기도 했던 그의 집필 시간 역시 크게 줄었다고 한다. 그는 "2018년 말에 문신 3권을 내놓고 2019년까지 5권까지 완간을 계획했는데 건강 문제로 집필활동이 지지부진해 자꾸 늦어지고 있다"며 "의사가 돌연사에 대해 심각하게 위험 경고를 해서 금년 말까지 잘 치료해 회복할 것"이라고 말했다.

작고한 박경리 작가에 대한 회한어린 말도 전했다. "박경리 작가의 혼이 담긴 이곳 토지문화관에서 지내다보니 살아생전 오랜 기간 찾아뵙지 못한 죄송함을 많이 느낍니다. 그가 줄곧 강조한 활인의 문학은 생명의 존엄성과 가치를 살리는 문학이에요. 그것을 제대로 살리는 데 기여할 수 있는 수단은 우리 전통문화의 하나인 해학이라고 생각해요. 흥부같은 가난뱅이도 해학을 통하면 구제받을 수 있고 삶이 완전히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거죠. 한국 문화안에 들어있는 해학성을 《문신》을 비롯해 향후 쓰게될 작품에 잘 반영해 드러낼 생각입니다."
은정진 기자 silver@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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