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두현의 문화살롱] '와사등' 시인이 무역협회 부회장 된 사연

입력 2020-10-23 17:31   수정 2020-10-24 00:13

시인 김광균은 ‘개성상인’이었다. 1914년 개성 선죽교 부근의 포목 도매상집에서 태어난 그는 개성상고(옛 개성상업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곳에서 자랐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부친이 별세하는 바람에 빚더미에 올랐다. 그 과정에서 어머니와 함께 셋방을 전전하며 장사의 원리를 몸으로 터득했다.

개성상고 1학년 때인 1926년에는 누나를 잃었다. 그때 쓴 시 ‘가신 누님’이 중외일보에 실려 만 12세에 소년 문사(文士)가 됐다. 고교 졸업 후에는 경성고무공업주식회사에 입사해 전북 군산지사에서 7년간 기업 실무를 익혔다. 그러면서 시작(詩作) 활동을 계속했고, 193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시 ‘설야(雪夜)’가 당선됐다. 그해 서울 용산의 본사로 옮기고 다음해 첫 시집 《와사등(瓦斯燈)》을 출간했다.


‘와사등’의 와사(瓦斯)는 가스의 일본식 한자음으로 가스등을 가리킨다.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려 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고교 교과서에 가장 많이 실린 작품이다. 당시 가스등은 근대를 상징하는 빛이었다. 그에게는 개성과 군산에서 체험한 문명의 발광체(發光體)이기도 했다. 그는 8세 때 개성에 처음 전기가 들어온 날을 회고하면서 ‘십촉짜리 전등불은 신화같이 밝아 불빛이 안마당에서 헛간까지 비쳐 우리들은 숨도 제대로 못 쉬고 놀랐다’고 표현했다.

이때 매료된 전등과 신문물에 대한 경이가 그의 시에 오롯이 반영됐다. 도시적 소재를 과감하게 다루고 시각과 청각을 접목한 공감각적 이미지로 시의 지평을 넓힌 것도 이 덕분이었다. 이는 곧 1930년대 모더니즘 시운동으로 이어졌다. 그는 1935년 이육사·서정주·신석초 등과 함께 ‘시인부락’ ‘자오선’ 동인활동을 하면서 시단에 확고히 자리 잡았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던 시인 김기림은 그를 ‘소리조차 모양으로 번역하는 기이한 재주를 가진 유망 시인’이라고 극찬했다.


그의 시구 ‘낙엽은 폴란드 망명 정부의 지폐’(‘추일서정’),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외인촌’), ‘먼 곳에 여인의 옷 벗는 소리’(‘설야’)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민적 명구(名句)다.

그의 운명은 두 번째 시집 《기항지》(1947) 출간 후 3년 만인 1950년 6·25전쟁 때문에 획기적으로 바뀌었다. 미처 피란가지 못하고 서울에 있던 그는 무역회사 ‘건설상회(후에 ‘건설실업’으로 개명)’를 운영하던 동생이 납북되는 바람에 회사를 떠맡아 ‘시인 기업가’가 됐다.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회사를 중견기업으로 탄탄하게 키운 그는 1960년 한국무역협회 부회장을 맡아 ‘수출보국(輸出報國)’에 진력했고, 1970년대에는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 이사까지 지냈다.

1981년 7월 26일자 한국경제신문 기고문 ‘내수산업의 운명’에서 ‘중화학산업 위주의 수출도 내수 기반이 튼튼해야 성공할 수 있다’며 경제 체질 개선을 위한 장단기 처방을 정부에 촉구하기도 했다.

1987년 KS물산 사장을 끝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는 시집 《추풍귀우》와 《임진화》를 펴내며 ‘시의 세계’로 돌아왔다. 이후 생활이 어려운 문인들을 남몰래 돕고, 작고 문인들의 문학비를 세워주며 문단의 또 다른 가로등 역할을 하던 그는 79세인 1993년 11월 23일 조용히 하늘로 떠났다. 그의 시 ‘설야’ 속 풍경처럼 첫눈이 내린 다음날이었다.

그는 식민지 시절의 가난한 나라에서 태어나 경제성장의 변혁기를 온몸으로 관통하면서 시와 경제의 두 등불을 동시에 밝힌 ‘시인 경영자’였다. 항산(恒産·일정한 생산)에서 항심(恒心·안정된 마음)이 나온다는 이치도 몸으로 보여줬다. 그야말로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같은 공감각적 인생을 살다 간 사람이었다.
은행원 T S 엘리엇을 빼닮은 '한국의 엘리엇'
“모더니즘의 맏형인 T S 엘리엇(사진)이 은행원으로도 훌륭했으니 기업가로 일가를 이룬 김광균 시인이야말로 한국의 엘리엇이다.”

시인 구상의 말처럼 김광균은 엘리엇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엘리엇 작품에도 정통했다. 기업가 시절, 영문과 졸업생이 그의 회사 면접 때 “영미시를 전공했다”고 대답했다가 엘리엇 시를 줄줄 외는 ‘시인 사장’ 앞에서 밑천이 거덜 나 진땀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올 정도다.

엘리엇의 아버지가 벽돌회사 사장이었으니 개성 포목점 아들이었던 그와 통한다. 미국 미주리주 세인트루이스에서 태어난 엘리엇은 하버드대 졸업 후 유럽으로 건너가 영국에서 1917~1925년(29~37세) 로이즈은행 직원으로 일했다. 매주 월~금요일 오전 9시15분부터 오후 5시30분까지 근무했다.

《멋진 신세계》의 작가 올더스 헉슬리는 “그는 최고의 은행원”이라고 평가했다. 로이즈은행의 한 간부도 “계속 있었으면 지점장이 될 수 있었다”고 했다.

그의 능력에 따라 연봉도 높아졌으나 과로 때문에 1921년 스위스 로잔에서 석 달간 요양을 해야 했다. 이때 그 유명한 시 ‘황무지’를 완성했다. 1925년에는 유명 출판사 편집자로 자리를 옮겨 더 높은 연봉을 받았다.

kdh@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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