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조→387조…"삼성의 거침없는 진격에 천하의 애플도 떨었다"

입력 2020-10-25 17:17   수정 2020-10-26 01:40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93년 2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양판점 베스트바이에서 먼지가 쌓인 채 처박혀 있던 삼성 TV를 목격했다. 그는 사장단을 불러 직접 보게 했다. “자기가 만든 물건이 어디에 있는지 직접 확인해라. 어디에 놓여 있고, 먼지는 몇 ㎜나 쌓여 있고, 얼마에 팔리는지 보라”고 지적한 그는 ‘TV 일류화’란 화두를 던졌다. “기술도 바뀌고 디스플레이도 바뀌니 모든 지원을 집중해서 하라”는 지시였다.

당시 삼성의 TV사업부는 국내에서도 1위를 확보하지 못했다. 세계 1위이던 반도체 사업부에서 150여 명의 연구개발 인력을 이식하는 등 전사적 지원이 시작됐다. 디스플레이가 브라운관에서 LCD(액정표시장치) 등 평면으로 바뀌자 이 회장의 예언은 들어맞았다. 2006년 삼성 TV는 판매 대수에서 세계 1위가 됐고, 이듬해 매출로도 1등에 올랐다. 윤부근 삼성전자 부회장은 “이 회장의 지시는 단순히 1등을 하라는 명령이 아니었다. 기술의 큰 흐름을 읽고 그런 화두를 던졌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혜안은 TV에서만 빛을 발한 게 아니다. 반도체 1위 부상, ‘애니콜 신화’와 스마트폰 세계 1위 등극, 디자인 일류화 등 삼성이 한 단계씩 도약할 때마다 그 원동력이 됐다.
끊임없는 위기의식과 변화 강조
이 회장 취임 첫해였던 1987년 삼성은 세계에서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젠 전 세계인이 아는 ‘글로벌 일류기업’이 됐다. 컨설팅사 인터브랜드가 지난 20일 발표한 ‘글로벌 100대 브랜드’에서 삼성전자는 세계 5위에 올랐다. 브랜드 가치 623억달러(약 71조원)로 애플, 아마존, 마이크로소프트, 구글의 뒤를 이었다.

이 회장 취임 때인 1987년 10조원이 채 안되던 삼성그룹 매출은 2018년 기준 386조원을 넘겨 39배로 늘어났다. 시가총액은 1조원에서 396조원으로 396배나 됐다. 취임 직후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기업으로 성장시키겠습니다”라고 했던 이 회장의 약속이 이뤄진 것이다. 이 기간 삼성은 스마트폰, TV, 모니터, D램, 낸드플래시 등 수많은 세계 1등 품목과 히트상품을 만들어냈다. 또 10만 명 남짓하던 임직원 수는 그새 세계에서 52만 명에 달한다.

이 회장은 내부에서 선지자로 일컬어진다. 1993년 삼성그룹에서 펴낸 내부교육용 ‘신경영’ 책자를 보면 그는 자동차의 전기화(전기차), 건물의 복합화(주상복합), 허브공항의 필요성, 중국의 추격 및 한국의 샌드위치화 가능성 등을 예견했다. 박근희 CJ대한통운 부회장(전 삼성생명 부회장)은 “이 회장의 신경영 철학은 세계 어디에도 없는 것”이라며 “이 회장만의 독특한 경영 철학이 오늘의 삼성을 있게 한 근본”이라고 말했다.
‘초일류’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
《삼성웨이-이건희 경영학》을 지은 송재용·이경묵 서울대 교수는 이 회장의 경영 일대기를 네 단계로 정리하고 있다. 1단계는 회장에 취임한 직후인 1988년부터 1993년까지다. 재계에선 당시 45세에 불과한 이 회장이 창업주인 선친 이병철 명예회장의 그늘에서 한동안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세기말적 변화가 온다. 초일류가 아니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당시로선 파격적인 개념을 내세우며 ‘제2의 창업’을 선포한다. 이 회장은 1983년 자신의 사재를 털어 시작한 메모리 반도체 사업을 1993년 세계 1위(D램 부문)로 올려놓으며 경영능력을 인정받는다.

세간에서는 삼성의 성공을 주목했지만, 이 회장은 오히려 당시를 절체절명의 위기로 정의했다. ‘많이 팔아 돈만 벌면 그만’이라는 사고방식이 바뀌지 않은 상태에서 세계 1위 달성은 의미가 없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때 나온 것이 1993년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신경영’ 선포다. 송 교수는 이때부터 5년을 2단계로 정의한다. 세계 곳곳에서 350여 시간 동안 이어진 ‘절규’에 가까운 연설을 통해 이 회장은 “양이 아니라 질(質) 경영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메시지를 임직원에게 전파했다. 그리고 7·4제(7시 출근, 4시 퇴근), 라인스톱제(불량이 발생하면 모든 라인을 멈추고 원인을 파악함) 등 파격적 제도를 도입해 삼성의 수준을 한 단계 도약시켰다. 그룹 내 부실도 과감히 도려냈다.

3단계는 한국이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 들어간 1997년부터 5년간이다. 국가는 위기에 빠졌지만 선제적으로 삼성의 위기 요인을 제거한 이 회장의 혜안은 더욱 주목받았다. 삼성은 당시 ‘파격적이고 성역 없는 구조조정’을 내세우며 59개 계열사를 40개로 줄이는 등 조직 재정비를 단행했다.

마지막은 2003년 이후 현재다. 이 회장은 융합, 디지털, 소프트라는 개념을 경영에 적극 도입했다. 2005년 ‘밀라노 선언’을 통해 ‘디자인 삼성’의 기치를 들었다. 브랜드 가치에 대한 투자도 대대적으로 단행했다. 2008년 ‘삼성 특검’으로 경영일선에서 잠시 물러나기도 했지만 2010년 복귀 이후 다시 한번 삼성에 ‘위기론’을 불어넣으며 갤럭시S 시리즈 같은 공전의 히트작을 만들어냈다.

당시 삼성전자는 글로벌 IT 업계에서 ‘공공의 적’으로 불렸다. 2011년엔 애플에 특허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당시 최고운영책임자(COO)였던 팀 쿡 애플 최고경영자(CEO)는 실적발표 자리에서 “우리 제품을 모방했다”며 삼성을 원색적으로 비난했다. 이에 대해 이 회장은 “못이 나오면 때리려는 원리”라며 “업종에 관계없이 삼성을 견제하는 움직임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사회 공헌, 문화도 선도
이 회장의 이상(理想)은 기업을 키우는 데 그치지 않았다. “자신의 노력과 상관없는 것으로 사람이 차별받아선 안 된다”고 늘 강조해온 이 회장은 교육 사업에 온 힘을 기울였다. 대표적인 예가 어린이집이다. 삼성은 1990년 당시 ‘달동네’였던 서울 송파구 마천동에 ‘천마어린이집’을 세웠다. “여성이 육아에 묶여 일하지 못하는 건 국가 경제가 한 발로 뛰는 것과 같다”는 판단에서다. 그렇게 삼성이 세운 어린이집이 전국에 57개소다. 1994년엔 ‘사회봉사단’을 설립해 초등학생의 공부방도 열어줬다. 2011년엔 ‘드림클래스’를 통해 중학생에게까지 무료 교육의 폭을 넓혔다.


김현석 기자 realist@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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