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수 적던 이건희…그의 인생 대부분은 '인간에 대한 공부'였다

입력 2020-10-25 17:28   수정 2020-10-26 01:38


이건희 삼성 회장은 1942년 1월 9일 대구에서 태어났다. 3남5녀 중 일곱째였다. 당시 호암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한창 바쁠 때여서 세 살 때까지는 경남 의령의 외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이 회장이 어린 시절 부친인 이 창업주를 만나는 것은 많아야 1년에 한두 번이었다.
고독을 견디며 집중력 쌓아
이 회장은 어린 시절 대부분 혼자 지냈다. 여섯 살이 돼서야 온 가족이 서울 혜화동에 모여 살게 됐다. 1947년 5월 이 창업주가 사업을 확장하며 대구에서 서울로 옮겼고, 이 회장은 혜화초등학교에 입학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1950년 6·25전쟁이 터지면서 마산, 대구, 부산 등으로 피란을 다녔다. 그러면서 이 회장은 다섯 번이나 초등학교를 옮겨다녔다. 가족들은 다시 뿔뿔이 흩어졌다.

이 회장은 소꿉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다. 초등학교 5학년 때인 1953년 “선진국을 보고 배우라”는 아버지의 말을 듣고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이 회장은 1989년 월간조선 12월호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친구도 없고, 놀아줄 상대가 없으니 혼자 생각을 많이 하게 됐고, 생각을 아주 깊이 하게 됐다. 가장 민감한 나이에 민족 차별, 분노, 외로움, 부모에 대한 그리움, 이 모든 걸 절실히 느꼈다.” 이렇듯 이 회장은 끊임없이 바뀌는 환경에 적응하면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이 회장은 내성적인 학생으로 통했다. 하지만 한번 말을 꺼내면 쉽게 반박하기 어려운 말들을 쏟아내 이따금 주변을 놀라게 했다는 후문이다. 고독 속에서 무언가를 분석하고 해법을 찾아가는 습관도 몸에 배었다. 일본 유학 3년간 이 회장은 대부분의 시간을 집과 영화관에서 보냈다. 유학 생활 동안 본 영화가 1000여 편에 이른다고 한다. 같은 영화를 10번, 100번씩 보기도 했다.

무언가에 꽂히면 며칠씩 밤을 새우면서 파고드는 날이 많았다. 라디오 등을 뜯어보고 다시 조립하는 취미도 생겼다. 대학 때 다시 일본으로 가 와세다대에 다닐 땐 당시 세계 최고로 발돋움하던 일본의 텔레비전, VTR, 카메라, 자동차를 분해하고 조립했다.


이 회장은 고교 시절 주변에 “나는 사람에 대한 공부를 가장 많이 한다”고 했다. 인간 본성에 대해 알려고 자신을 교보재로 실험한 적도 있다. 그는 한 손을 묶고 24시간을 견딘 뒤 “극복해봐라. 이게 습관이 되면 쾌감을 느끼고 승리감을 얻게 되고 재미를 느끼고 그때 바뀐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신경영’ 책자에서 밝히기도 했다. 이렇게 쌓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은 삼성 인재경영의 바탕이 됐다는 전언이다.

고교 졸업 후 연세대 입학이 확정됐지만 “외국으로 나가라”는 부친의 지시에 일본 와세다대와 미국 조지워싱턴대를 다녔다. 1965년 조지워싱턴대 재학 당시 홍진기 전 중앙일보 회장의 장녀 홍라희 전 리움미술관장과 맞선을 봤다. 다음해 동양방송에 이사로 입사해 홍 전 관장과 결혼했다.
45세에 삼성 회장으로 취임
이 회장은 이 창업주를 따라다니며 직관력과 동물적 경영감각을 익혔다. 장인인 홍 전 회장으로부터는 법에 대한 개념과 사회 움직임을 배웠다. 홍 전 회장은 딸인 홍 전 관장에게 “이 서방은 그릇도 큰 데다 남의 말을 경청하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니까 내가 그냥 쏙쏙 넣어주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런 신임 등이 이 회장이 삼성그룹 회장이 되는 발판이 됐다. 처음에는 큰형인 이맹희 전 CJ그룹 명예회장과 작은형인 이창희 전 새한그룹 회장에게 밀렸다. 《호암자전》에 따르면 이 창업주는 이 회장에게 중앙일보 등 미디어 사업을 맡길 생각이었다.

이 창업주는 1977년 일본 닛케이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장남은 성격으로 봐 기업에 맞지 않아 손을 떼게 했다. 차남은 중소기업 정도의 사고방식밖에 없기 때문에 삼성을 맡길 수 없다. 따라서 아들 셋 가운데 막내아들로 후계자를 결정했다”고 털어놨다.

이 회장은 1978년 삼성물산 부회장, 1979년 삼성그룹 부회장에 올랐다. 후계자로 낙점된 뒤에도 이 회장은 늘 말을 아꼈다. 그저 이 창업주 뒤를 묵묵히 따라다녔다. 여러 기록과 사진에도 이 회장은 이 창업주 뒤에 말없이 서 있다.

그러나 1974년 한국반도체 인수만큼은 단독 행동에 나섰다. 동양방송 이사였던 이 회장은 오일쇼크 와중에도 사재를 털어 파산 직전이던 한국반도체 지분 50%를 50만달러에 인수했다.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에선 사업성이 없다고 봤지만, 이 회장은 미래가 반도체에 달려 있다고 판단했다.

신경영 선언 후 10년도 안돼 건강 악화
1987년 이 창업주가 세상을 떠난 뒤 이 회장은 45세의 나이에 회장으로 추대됐다. 그는 취임 당시부터 ‘초일류 기업’을 목표로 내걸었다. 끊임없이 혁신과 변화를 추구하는 ‘이건희식 경영철학’을 강조했다. 1993년 신경영 선언 때는 열두 시간을 쉬지 않고 강연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자’ 등으로 유명한 신경영으로 삼성은 천지개벽을 했다.

그로부터 6년 뒤 이 회장의 건강이 악화됐다. 1999년 말~2000년 초 폐 림프절에서 암세포가 발견돼 미국 MD앤더슨 암센터에서 수술과 치료를 받았다. 완치는 됐지만 이후 활동은 크게 제약을 받았다. 이 회장은 매년 겨울이면 기후가 따뜻한 일본이나 하와이 등에서 지내며 건강 관리를 해왔다.

2014년 5월에는 급성심근경색증으로 서울 이태원동 자택에서 쓰러졌다. 호흡곤란 증세가 나타나 한남동 순천향대병원으로 옮겨졌지만 응급실에 도착하자마자 심장마비가 와 심폐소생술을 받았다. 응급 처치로 심장기능 상태를 회복한 이 회장은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으로 옮겨 심장혈관 확장술을 받았다. 이후 장기 입원치료를 받다가 끝내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타계했다.

정지은/김현석 기자 jeo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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