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아닌 끝없이 창조하는 과학자·예술가 같았다"

입력 2020-10-25 17:39   수정 2020-10-26 01:36

“고등학생 이건희 군은 근엄하기는커녕 엉뚱하고 싱거운 친구였다.”

지난 6월 별세한 홍사덕 전 국회 부의장과 이건희 삼성 회장은 서울사대부고 동창으로 60년 지기였다. 책가방을 한쪽 어깨에 둘러멘 불량학생 자세로 달려가며 배가 고프다면서 군용천막 안의 즉석 도넛가게에서 도넛을 몇 개씩 먹어치우고, ‘아이스께끼’를 빨아먹던 학생이었다. 당시 홍 전 부의장은 ‘녀석, 가정 형편이 우리 집 수준밖에 안 되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부잣집 도련님’이었지만 승부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았다. 서울사대부고 13회 졸업생들 사이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이 회장이 고등학교 2학년 때 학교 ‘일진’과 맞짱을 뜬 사건이다. 수업을 마친 후 학생들의 발길이 뜸한 도서관 뒤에서 벌어진 싸움은 무승부로 끝났다. 홍 전 부의장은 “건희는 말도 잘 안 하고 정말 떡두꺼비 같았는데, 알고 보니 건희가 먼저 붙자고 한 싸움이었다”며 “말수는 적었지만 승부를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 ‘싸움닭’ 기질이 있었다”고 회고했다.

생각의 수준도 일반 고등학생과는 많이 달랐다. “공장을 지어서 일자리를 많이 만들어내는 게 어떤 웅변보다 애국하는 길이다” “이익을 내지 못하는 기업은 사실상 나라를 좀먹는 존재다”는 등 고등학생이 상상도 하지 못했던 분야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고 한다.

집요한 성격 덕분에 세상을 보는 안목과 통찰도 남달랐다. 이 회장과 약 35년간 함께 일한 윤종용 전 삼성전자 부회장은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볼 정도로 연구해 지혜에 도달하는 ‘격물치지’를 실천하신 분”이라며 “세종대왕이 그랬던 것처럼 기술과 인재를 회사의 가장 큰 자산으로 생각하셨다”고 회고했다.

이어령 전 문화부 장관은 이 회장에게서 “‘기업인’이 아니라 외롭고 깊은 침묵 속에서 끝없이 무엇인가를 창조해가는 ‘과학자’나 ‘예술가’의 모습을 봤다”고 했다. 문화부 장관 출신인 자신보다 더 날카로운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다는 말이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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