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프리즘] 기업 자유, 거저 얻는 건 아니다

입력 2020-10-26 17:44   수정 2020-10-27 00:30

1980년 6월 어느날. 뉴욕의 월도프아스토리아호텔에 기업인들과 로널드 레이건 공화당 대통령 후보가 모였다. 공화당 전당대회를 앞두고 재계에서 요청한 자리였다. 제너럴일렉트릭(GE) 모건스탠리 화이자 등 내로라하는 기업의 최고경영자(CEO)들이 참석했다. 이들은 레이건에게 질문을 던졌다. “당신은 자유시장 경제를 지키기 위해 어떤 실행안을 갖고 있는가?”

레이건은 작은 정부-큰 시장, 감세 등의 플랜을 꺼내면서 자유시장 신념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나중에 레이거노믹스로 구체화된 핵심 플랜들이었다.

기업인들은 레이건이 자리를 뜬 후 곧바로 레이건 당선을 위한 기업인자문단을 조직했다. 포천 500대 기업은 물론 여성기업인단체 등이 모두 이름을 올렸다. 레이건 캠프의 공약에 깊숙이 관여했고, 선거 자금 모금에도 열성적으로 참여했다. 심지어 기업 홍보 전략가들이 모여 레이건 당선을 위한 PR 전략도 컨설팅했다. 기업인들의 레이건 지지운동은 미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GE의 경우 직원들이 레이건의 이념을 공유할 수 있도록 강좌를 개설했다. 주요 주주들을 상대로 이메일 보내기 운동도 벌였다.

미국 역사학자 킴 필립스 페인 뉴욕대 교수는 책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s)》에서 레이건이 지미 카터를 물리치고 미국 40대 대통령으로 당선될 수 있었던 1등 공신은 바로 기업인들의 절대적 지지라고 분석했다. 그는 “자유시장 가치를 지키기 위한 기업인들의 피나는 투쟁이 오늘날 미국을 지탱하는 힘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미국 사례를 장황하게 언급한 이유는 최근의 한국 상황과 너무나 대조되기 때문이다. 여당이 밀어붙이고 야당이 방조하는 ‘기업규제 3법’은 기업들엔 그야말로 생존이 걸린 문제다. 경제단체들이 너도나도 국회를 찾아 읍소하고 있지만, 절박해 보이지 않는 이유는 뭘까.

재계 인사는 이런 쓴소리를 내뱉었다. “지난 총선에서 여당이 압승할 때부터 예견된 일이었는데 넋 놓고 있다가 이제 와서 뭐하자는 건지 모르겠다. 여야 지도부를 만나 사진 찍고 언론에 기사 한 줄 나오면 그만인가? 쇼잉(보여주기) 좀 그만하자.”(A업종 협회장)

말로는 ‘연합전선’ 얘길 하지만 경총이 주도하는 자리엔 전경련이 빠지고, 전경련이 주관하는 자리엔 경총과 대한상의가 빠진다. 사분오열이 따로 없다. 오죽하면 “전경련이고, 경총이고, 대한상의고 다 비싼 건물과 땅 깔고 앉은 배부른 부동산업자들 아니냐. 재계를 위해 발로 뛰어 관철시킨 거라도 있나”(B기업 고위 임원)라는 목소리까지 나올까.

이 정부 들어 재계 맏형 역할을 자임한 대한상의에 대한 불만은 더 크다. 최근 대한상의가 ‘감사위원 분리선임’을 담은 정부·여당의 상법개정안에 대해 대안이랍시고 내놓은 것에 한 기업인은 ‘똥볼’을 찼다며 분개했다. 투기펀드가 추천한 감사에 대해서는 대주주 의결권 제한을 풀자는 것인데, “투기자본에 꼬리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사전에 투기자본인지 아닌지 도대체 누가 아나? 업계 현실도 모르고 대안이라고 내놓고 있으니…”라는 비아냥이 쏟아지고 있다.

시장경제 역사가 다른 미국의 사례를 한국에 그대로 대입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서슬 퍼런 권력이 기업을 마음대로 이용해 놓고 권력이 뒤바뀌면 잡아넣는 곳이 지금 한국이다. 그럼에도 결국 기업은 기업 스스로가 지켜낼 수밖에 없다. 정치권은 아무리 읍소해도 ‘쇠귀에 경 읽기’다. 그래놓고 아쉬울 땐 달라붙어 뜯어먹으려 하는 게 정치권의 하이에나 같은 생리 아닌가.

그나마 최근 12개 업종단체가 모여 공동 대응을 위한 산업연합포럼을 결성한 것은 작지만 큰 걸음이다. 이게 단초가 돼 한국판 기업 권리회복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길 기대한다.

jtch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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