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준의 데스크 칼럼] 생각중독자 이건희의 유산

입력 2020-10-28 17:53   수정 2020-10-29 00:28

2009년 삼성을 취재할 때다. 영상 하나를 보게 됐다. 한 사람이 억센 경상도 억양으로 담뱃재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연설을 하고 있었다. 때론 침착하게, 때론 격분해 몇 시간째 말을 이어갔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으로 알려진 1993년 이건희 회장의 영상이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1993년은 이마트 1호점이 문을 연 해다. 그해 그는 “복합몰의 시대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렇게 됐다. 또 전기차, 수소차 얘기를 하면서 “인류에 해를 끼쳤다”고 미국 자동차 업체들을 비난했다. 바위에서 폼만 잡고 있는 수사자, 사냥하고 새끼를 키우는 암사자를 비교하며 여성 인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25세 이상 여성 중 대졸자 비중이 10% 수준일 때였다.
고독이 이건희에게 준 선물
이런 말도 했다. “최근 몇 년 새 마쓰시타 고노스케 같은 일본의 최고경영자가 세상을 떠났다. 우리에게 기회가 될 수 있다.” 예언처럼 적중했다. 파이낸셜타임스가 그를 ‘선지자’로 평가한 것도 이런 맥락이었던 듯하다. 도대체 그는 어떻게 미래를 내다볼 수 있었을까. 그의 삶과 발언을 되짚어보면 어렴풋하게 답을 찾을 수 있다. ‘고독이 준 선물, 생각’이었다.

그는 젖을 떼자마자 할머니에게 보내졌다. 어릴 적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았다. 초등학교 때는 일본으로 가 몇 년을 지냈다. 한국으로 돌아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 일본으로 갔다. 대학원은 미국에서 다녔다. 젊은 날을 유랑객처럼 보냈다. 이 시절에 대해 그는 “태어나면서 떨어져 사는 게 버릇이 돼 내성적 성격을 갖게 됐다. 친구도 없고 하니 혼자 생각을 많이 했다. 생각을 해도 아주 깊이 하게 됐다”고 했다. 외로움에 대한 보상은 생각이었다.

이건희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키워드인 생각에 관해 직접 한 발언도 있다. “우리는 물리적 고통은 잘 견디지만 정신적 고통은 잘 못 참는다. 정신적 몸살을 앓을 정도로 고민하고 분석해야 한다.” 정신적 몸살, 뇌가 몸살이 걸릴 정도로 생각해야 한다는 얘기였다.

방법도 제시했다. “정신적 훈련도 하면 된다. 달리기와 같다. 2㎞를 뛰다가 3~4㎞를 뛰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안 뛰다가 4㎞를 뛰면 문제가 생긴다.” 근육을 키우려면 도저히 들 수 없을 것 같은 순간 역기를 한번 더 들어야 한다. 그때 근육의 파열이 일어나고 팽창된다. 뇌 근육도 훈련을 통해 키울 수 있다는 말이었다.
정신적 몸살에 걸려본적 있나
강준만 전북대 교수는 이런 이 회장을 “생각중독자”라고 표현했다. 이 회장이 자서전을 내놨다. 제목은 《생각 좀 하며 세상을 보자》였다. 가볍지만 생각중독자 이건희가 자서전에 달 만한 제목이었다.

그가 내린 대부분의 중요한 결정은 이 생각을 통해 나왔다. 그렇다면 생각의 재료들은 어디서 왔을까. 그는 정보와 기록에 집착했다. “데이터가 모이면 정보가 되고 상식이 된다. 상식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면 지식이 되고, 더 깊이 파고들어가면 전문지식이 되고 지혜가 된다”고 했다. 요즘말로 하면 빅데이터다. 그는 영화광이기도 했다. 해외 다큐멘터리와 잡지 등을 보며 역사와 자연을 연구했다. “인간 연구에 80%의 시간을 보냈다”고 할 정도로 사람에게 관심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생각의 재료가 됐다. 사물에 대한 관찰, 생각에 기반한 성찰의 결과는 미래를 보는 통찰로 이어졌다.

시대의 생각중독자는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하고 있는 듯하다. “당신은 정신적 몸살이 걸릴 정도로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junyk@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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