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대기획] 투자, 판이 바뀐다 1부 "위기의 파고를 넘어"

방서후 기자

입력 2019-01-01 10:13   수정 2018-12-29 10:50

    대한민국 정부 수립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강의 기적이라 불릴 만큼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룬 배경에는 우리 금융투자업계가 있었습니다.

    자본시장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 1953년 대한증권업협회가 설립되고 3년 후 증권거래소가 개장하면서 대한민국 금융투자산업과 자본시장 역사가 시작됐습니다.

    1960년대 이후 증권거래법, 자본시장육성법, 기업공개촉진법이 제정되고 우리 금융투자업계는 국가 경제 재건을 위한 자금 조달 창구로서 자본시장 활성화를 위해 노력해 왔습니다.

    숱한 위기가 있었지만, 그 위기를 기회삼아 눈부신 속도로 진화해 온 우리 자본시장은 여의도의 기적, 그 자체였습니다. 요즘은 휴대전화만 있으면 손가락 하나로 간편하게 주식 거래를 할 수 있지만 예전에는 모든 작업이 손으로 이뤄졌습니다.

    고객이 증권사 지점에 주문을 내면 증권사를 대신해 거래소에 나온 시장 대리인들은 고함을 치거나 두 손을 번쩍 들어 '손질'로 호가를 표시하기 바빴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던 거래소 시장 담당 직원이 순간적으로 가격과 물량의 합치점을 찾아 '격탁', 이른바 딱딱이를 쳐야만 매매가 성사됐습니다.

    사실상 일제강점기 투기 시장 모습과 다를 바 없던 집단매매가 현대식 개별경쟁매매로 구색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명동에 있던 거래소가 여의도에 새 둥지를 틀면서부터입니다.

    증권사들도 하나 둘 씩 여의도에 몰려들었고, 외딴 섬에 불과했던 여의도는 본격적인 증권가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매일 오전과 오후 두 차례에 걸쳐 열리는 거래소 시장. 입회장 곳곳에 있는 육각형 모양의 포스트에서는 주식과 회사채 등 모든 증권의 거래가 일어났습니다.

    먼저 일반 투자자들로부터 매매 주문을 받은 각 증권회사들이 시장에 나와 있는 대리인을 시켜 주문표에 사거나 팔기를 원하는 종목의 수와 값을 적어서 포스트에 제출합니다.

    그러면 포스트 안에 있는 거래소 직원들은 팔자는 주문과 사자는 주문을 대조해 거래를 체결시키고, 이 때 결정된 가격은 객장에 방송으로 울려 펴집니다. 시장 대리인이 거래 증표인 매매장에 확인 도장을 받으면 비로소 거래가 마무리됩니다.

    전국 각지의 영업점들은 거래소 방송실에서 전하는 음성 유선방송에 귀 기울이며 수십 분 늦은 시세를 받아적곤 했습니다.

    아직은 컴퓨터가 없던 시기인 만큼 시세 표시는 칠판에 분필로 쓰거나 숫자 자석을 사용했습니다.

    [인터뷰] 이종우 前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그 당시에는 주가가 어떻게 되는지 하는 시세에 접근할 수 있는 방법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점에 가서 전광판을 보든지, 아니면 전화로 지점 직원에 문의하든지, 지금 삼성전자 주가가 얼마입니까 이렇게 물어보든지 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지점에서 주문을 낸 고객이 거래 체결 소식을 전해 들으려면 30분 넘게 기다려야 하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인터뷰] 김영익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그 때는 전산시스템이 안 돼 있어서 전화로 주문을 받았습니다. 신입사원이었을 때 교육 1주일 받고 지점에 가서 주문 받았던 기억이 납니다. 그 때는 기업 분석도 안 돼 있고 거시경제 분석도 안 돼 있었습니다. 그 당시 어떤 회의를 들어갔는데 M2(총통화) 이런 개념 자체를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해도 못하고 투자했었습니다."

    이렇듯 오랜 수작업 거래와 시세표시 방식은 70년대 중반 국내 상장사가 급증하면서 한계를 드러냅니다.

    거래가 큰 폭으로 늘자 각종 주권 위변조 사건도 끊이지 않았고, 규격화된 유가증권을 발행하고 이를 보관하기 위한 기관이 필요해졌습니다. 예탁결제원이 설립된 이유입니다.

    [인터뷰] 박종진 한국예탁결제원 전자증권개발지원단 단장

    "예전에는 금고라는 게 있었고 신입 직원들이 입사하면 금고에 가서 모든 유가증권을 실물로 예탁하고 금고에 보관하고 인출건이 있으면 다시 내어주는 그런 역할을 했었죠. 그래서 그 때는 유가증권이 예탁되면 그것을 세고 카운팅하고 촬영해서 보관하고 해야 했기 때문에 저희들 손목에는 항상 금팔찌 대신에 고무줄이 있었습니다. 고무줄로 100매 단위로 묶어서 보관해야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경제가 발전할 수록 거래소와 증권사 직원들은 월급보다 야근 수당이 많을 정도로 과중한 업무에 시달렸습니다.

    주문 배달 사고 또한 급증해 한 해 동안 창구 사고로 문책을 받은 증권사 직원이 230명에 달할 정도였습니다.

    놀라운 경제 발전 속도만큼 급증하는 주식 거래를 감당할 만한 인프라 구축이 시급했던 우리 금융투자업계는 한국증권전산, 지금의 코스콤을 필두로 10년에 걸쳐 모든 거래를 전산화하기에 이릅니다.

    칠판을 대신한 전자시세게시판이 등장했고, 지금의 HTS와 같은 증권정보문의 단말기가 실시간으로 시세와 기업 정보를 알려줬습니다.

    창구 직원이 전화 대신 전산으로 매매 주문을 내면 증권사 대리인이 거래소로 가지 않아도 바로 주문이 체결됐습니다. 이렇듯 혁명에 가까운 실시간 매매 시스템 구축은 우리 증시가 자본시장의 젖줄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됩니다.

    80년대에 접어든 우리 금융투자업계는 3저 효과에 따른 경제호황과 더불어 국민주 보급과 간접투자저변 확충 및 채권시장 활성화를 통해 국민소득 향상과 기업성장의 조력자로서 이바지했습니다.

    한국 경제의 고도성장과 사상 초유의 경상수지 흑자전환에 힘입어 100포인트로 시작한 코스피 지수가 1천 포인트를 처음으로 돌파하는 대기록도 세웠습니다.

    [인터뷰] 김영익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제가 1988년에 증권사에 입사했는데 그 당시 주식 시장이 너무 좋아서 증권회사 다니면 일등 신랑감이라고 했습니다. 80년대 중후반 플라자 협정 이후 엔화가 강세를 보였잖습니까. 그러다보니 우리 기업들의 수출 경쟁력이 생겼고, 조선·전자·반도체 이런 기업들이 크게 성장했죠. 대표적으로 삼성전자라 볼 수 있는데 그런 기업들이 꾸준히 성장하면서 한국 경제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주가지수 '네자릿수 시대'가 열린 데에는 삼성전자와 현대차 등 지금의 증시를 이끄는 쌍두마차의 상장과 더불어 증시 대중화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국민주 보급 정책이 효자 노릇을 했습니다.

    일례로 포항제철이 국민주 1호로 상장될 때는 호가 표만 2m 이상 쌓이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으며, 거래소 직원들이 호가표를 정리하지 못해 다음날 새벽을 넘겨 매매가 완료되기 일쑤였습니다.

    [인터뷰] 이종우 前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당시 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전날 거래된 주식이 50만주 거래가 되고 그러면 다음날 시세를 하루에 네번 밖에 형성시켜주지 않았습니다. 전산 용량이 따라가지 못하다보니 이른바 단일가로 묶어서 할 수밖에 없었죠."

    꽃길만 걸을 줄 알았던 우리 증시. 하지만 위기는 찾아왔습니다. 1997년 한보철강의 부도를 시작으로 내로라하는 대기업들이 차입금을 상환하지 못해 부도를 내고 줄줄이 무너진 겁니다.

    1994년 11월 1,145포인트였던 주가지수는 277포인트까지 추락했는데, 이 수치는 앞으로도 깨지지 않을 기록으로 평가받습니다. 결국 우리 정부는 구제 금융을 지원받고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는 흑역사를 남깁니다.

    [인터뷰] 김영익 서강대학교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1997년 외환위기 때 많은 기업들이 없어졌습니다. 제가 다녔던 회사도 시장에서는 굉장히 어려울 것이다. 이런 전망들이 나왔었습니다. 그러다보니 일부 직원들이 더 어렵기 전에 나가자 하면서 직장을 떠났었죠."

    [인터뷰] 이종우 前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역시 제일 크게 기억에 남는 이벤트는 뭐라 해도 외환위기입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외환위기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인식이 별로 없었다라는 생각이 듭니다. 80년대 말 90년대 초까지 주가가 3저 호황으로 1천 포인트를 넘으면서부터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부가 아무리 주가 하락을 막으려 해도 막히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국가적인 어려움이 닥쳤을 때, 우리 금융투자업계는 모험을 합니다. 코스닥 시장을 활성화해 중소벤처기업으로 자금이 원활하게 공급되도록 지원했고, 그 결과는 성공적이었습니다.

    [인터뷰] 김재철 코스닥협회장

    "한국 경제 어려움, 대표적으로 IMF 사태가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 공교롭게도 10년 후에 2008년도 금융 위기가 있었습니다. 어려움을 10년 단위로 겪긴 했었지만 한국 경제는 충분히 잘 이겨냈던 것 같습니다."

    전 세계를 혼란에 빠뜨린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에도 코스피 지수는 채 1년이 되지 않는 기간 동안 50% 이상 폭락했습니다.

    하지만 이듬해에는 언제 그랬냐는 듯 FTSE 선진지수에 편입되는 성과를 거둡니다. 쉽게 말해 글로벌 금융기관에서는 한국을 증시 선진국으로 보고 있다는 겁니다. 랭킹에 꼽히지 조차 못하던 우리 증권시장은 어느덧 세계에서 손꼽히는 선진시장이 됐습니다.

    12개에 불과하던 상장 종목 수는 2,400개로 200배 늘었고, 하루 평균 거래대금만 13조6천억 원으로 명동에 처음 거래소가 생겼을 당시 총 거래대금에 견줄 만큼 규모가 커졌습니다.

    경제인구 5명 중 1명은 주식투자를 할 정도로 주식은 보편적인 자산증식수단이 됐습니다.

    [인터뷰] 이종우 前 IBK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

    "30년 전 거래소 목표가 무엇이었냐면 상장사 400개, 그 다음이 시가총액 100조원이 목표였습니다. 지금은 거래소, 코스닥 시장 합하면 2천조원이 넘습니다. 굉장히 규모가 커진 겁니다. 제도적인 형태의 자본시장을 생각하면 우리나라 제도는 선진국 어떤 나라보다 훌륭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미국발 금융위기를 초래한 주범으로 꼽힌 파생상품 계약의 투명성을 높이고, 리스크를 관리할 수 있는 툴을 구축해 파생시장의 신뢰를 회복시키고자 한 노력도 통했습니다.

    지난 1996년 파생상품시장이 열린 첫 해 1,600억원이던 하루 평균 거래대금은 지난해 244배 증가한 39조1천억원을 기록했습니다.

    [인터뷰] 정창희 한국거래소 부이사장

    "2008년 금융위기가 생겼을 때 장외 파생상품 시장에 대한 명확한 투명성이 없어서 비롯됐습니다. 장외파생 상품시장이 워낙 규모가 크고, 투명성이 부족하고 상호 연관된 부분이 굉장히 밀접해서 이 부분에 대한 파악이 안되면 금융위기, 시스템 리스크로 확산될 수 있다고 본 겁니다. 그래서 그런 부분을 없애기 위해서 장외 파생 상품 시장을 모두 다 거래소에 보고하도록 하고, 표준화된 장외 상품은 거래소와 같은 시스템에서 거래되게 하거나, CCP라는 청산 시스템을 통해서 청산되게 하거나, 청산되지 않는 물량에 대해서는 다시 높은 자본 요건을 요구하는 것으로..."

    외국의 지원을 받던 나라는 이제 외국에 거래 인프라를 수출하거나, 코넥스, 금, ETN, 탄소배출권 시장 등 다양한 분야로 거래 영토를 넓히고 있습니다.

    실제로 한국거래소가 빠르고 안정적인 주식거래를 위해 출시한 차세대 신매매시스템, 엑스추어 플러스는 매매체결 속도를 획기적으로 향상시키면서도 오류를 최소화해 세계 곳곳에서 수주 낭보를 울리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대영 한국거래소 IT 전략부 부장

    "2005년도 통합 거래소 출범하기 시작하면서 IT 인프라 투자를 열심히 했습니다. 예를 들면 2009년에 엑스추어라는 4개 기관 통합된 매매체결 시스템을 통합해서 구축을 시작했고 가동했는데, 베트남, 태국, 아제르바이잔, 필리핀 등 현재까지 지금 8개국에 총 14개 IT 시스템을 수출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후속작) 엑스추어 플러스의 처리 속도는 약 70마이크로세컨즈입니다. 70마이크로세컨즈라고 하면 주문 한 건을 처리하는데 백만 분의 70초 정도 걸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제가 알고 있는 그 어떤 선진국 거래소보다 빠르고 우수한 속도입니다."

    전자증권제도는 한국 주식시장을 한 단계 더 도약하게 만드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전자등록만으로 증권의 발행, 유통, 권리행사 등의 절차를 처리해 증권 실물방행에 따른 비용, 위변조, 탈세, 음성거래 등을 원천 차단하겠다는 겁니다.

    과거 금융실명제 도입으로 금융시장의 투명성이 획기적으로 개선된 것처럼 전자증권의 도입은 증권시장 투명성 제고는 물론, 5년 간 4조원에 달하는 경제효과를 불러일으킬 전망입니다.

    [인터뷰] 박종진 한국예탁결제원 전자증권개발지원단 단장

    "가장 큰 효과는 세 가지. 먼저 증권의 실명제라는 자본시장의 투명성 확대,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앞두고 디지털 기반 마련, 그리고 국제 정합성 마련. 이게 제도적 변화의 가장 큰 측면이라고 할 수 있겠고요. 개별적으로 본다면 투자자 입장에서는 지금까지 시장 자체가 투명하지 않아서 증권 정보를 취득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는데 앞으로는 그러한 부분이 대폭 개선돼서 발행회사와 투자자 정보 비대칭성이 상당 부분 해소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우리 자본시장은 이제 국내에 그치지 않고 세계를 무대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인터뷰] 김대영 한국거래소 IT 전략부 부장

    "거래소 통합 이후 15년 간 잘 해왔지만 향후 10년, 20년도 잘 꾸려나가야 하고, 또 이런 새로운 기술 트렌드를 저희 자본시장에 반영해야 해서 새로운 넥스트 엑스추어 플러스 버전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것을 잘 살려서 해외 사업이라든가, 우리 자본시장 시스템 안정성을 추구하는데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K팝에서 시작된 한류 열풍은 K파이낸스라는 새 이름을 달고 세계 곳곳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인터뷰] 박종진 한국예탁결제원 전자증권개발지원단 단장

    "90년대 후반에 태국의 대차 거래 서비스를 저희가 구축한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2000년대 초반에는 베트남에 가서 베트남 증시 발전을 위한 컨설팅을 주도한 적도 있고요. 2016년에는 인도네시아 자산운용 산업 시스템을 지원하는 시스템도 구축했습니다. 이렇게 현재까지 저희가 해 온 것이 자본시장의 발전과 자본시장 자체의 금융 한류적인 부분에서 활약해 왔었고, 지금까지 해 온 것들을 바탕으로 전자증권제도와 같은 선진 서비스를 도입해서 앞으로는 우리 자본시장이 좀 더 발전하고 좀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시장으로 거듭나서 국제적으로 경쟁력있고 오히려 국제 시장을 선도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금융 산업의 칸막이가 사라지고 겸업화가 진행되는 금융 빅뱅의 시대.

    거래 시스템 정비와 투자 안전판 강화에 힘쓰는 자본시장 컨트롤타워와 글로벌 투자은행으로 활약하는 증권사들이 힘을 모아 대비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기적을 만든 여의도의 기척처럼, 지나온 날보다 더 밝은 앞날을 향해 달릴 우리 금융투자업계의 또 다른 기적을 기대해 봅니다.

    (기획: 오연근·이봉익, 취재: 정경준·방서후·이민재, 영상편집: 최민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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