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한 마디에 무너진 ‘샐러리맨 신화’

고영욱 기자

입력 2020-01-15 17:35   수정 2020-01-16 08:44

짓밟힌 기업은행 청년들의 꿈
기업은행 직원 A씨는 올해로 10년차다. 기재부 출신인 윤용로 행장 때 입행해 일 년 뒤 내부출신 조준희 행장 교체기를 눈앞에서 봤다. 평범한 행원에서 은행장이 된 선배를 보고 ‘샐러리맨 신화’라고들 했다.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주변에서는 은행장을 꿈꾸는 이들도 생겼다.
13년차 직원 B씨에겐 가장 기억에 남는 행장이 두 명이다. 모든 기업은행 직원들이 한마음으로 추모했던 故강권석 행장, 그리고 기업은행을 현재의 반열에 올려놓은 김도진 행장이다. 소탈한 성품으로 유명한 김 행장은 임기 동안 전 세계 650개 모든 영업점을 방문한 유일한 행장이기도 하다. B씨는 두 행장을 보고 존경받고 사랑받는 CEO란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됐다.
권선주 행장 때 입행한 7년차 직원 C씨는 최근 윤종원 행장 선임을 두고 “희망을 뺏겼다”는 느낌을 받았다. “열심히 일해도 조직의 수장이 될 수 없다”는 신호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허탈감도 허탈감이지만, 갑자기 외부에서 수장이 온 배경에 대해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윤 행장이 과거 금융권 임금 등을 두고 부정적 발언을 한 만큼, 복지나 처우가 나빠질 것에 대한 우려가 크다.
문 대통령 “기업은행 모범적”

<사진설명: 2019년 3월 21일 윤종원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이 `혁신금융추진방안보고대회`를 위해 IBK기업은행을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을 수행하고 있다.>
지난해 3월 21일. 문재인 대통령이 기업은행을 방문했다. 이 자리엔 윤종원 당시 청와대 경제수석도 함께 했다. 문 대통령은 기업은행이 투자한 영화 ‘극한직업’의 성공과 스타트업 육성 플랫폼인 ‘IBK창공’ 등의 성과를 두고 모범적이라고 평가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은행이 이렇게 창업공간도 주고, 창업 자체를 지원하는 줄을 몰랐는데 금감원이 감독 평가할때 가점을 (줘야 하지 않겠냐)”고 치켜세웠다. 또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은행이 안정적인 주택담보대출만 해서 수익을 내고 가장 변하지 않은 영역이 금융권이라고 생각하는데 혁신금융을 위한 기업은행의 이런 성과들이 많이 알려졌으면 한다”고 말했다.
문 대통령 취임 이후 기업은행의 실적도 고공행진을 거듭했다. 2017년 1조 5,085억원, 2018년 1조 7,643억원으로 사상최대치를 갈아치웠다. 지난해는 3분기까지 1조 3,678억원으로 다소 주춤했지만 저금리 기조를 감안하면 적지 않은 수치다.
일자리 창출 기조에 발맞춰 채용도 늘렸다. 2016년 190명에 불과했던 정규직 행원 채용인원은 2017년 280명, 2018명 380명, 2019년엔 439명이다. 기업은행은 2014년부터 금융위원회의 금융공공기관평가에서 6년 연속 A등급을 기록해왔다.
대통령은 ‘변화’·새 행장은 ‘혁신’ 주문

<사진설명: 2020년 1월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연합뉴스 제공>
한 마디로 잘했다. 그러나 인사권자인 대통령의 눈엔 무엇이 부족했던 걸까.
문재인 대통령은 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윤종원 기업은행장 임명과 관련해 "우리(정부)가 변화가 필요하면 외부에서 수혈하는 것이고 안정이 필요하면 내부에서 발탁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기업은행은 정부가 출자한 국책은행이고 정책금융기관으로, 인사권이 정부에 있다”고 강조했다.
낙하산 인사논란과 관련해 문제가 없다는 뜻을 밝힌 것이지만, 외부수혈의 정당성인 변화가 어떤 면에서 필요한지에 대해선 언급이 없었다.
하루 앞서 13일, 윤종원 신임 기업은행장은 서울 은행회관에서 첫 `경영현안 점검회의`를 열고, ‘혁신’을 강조했다. 이 자리에 있었던 고위관계자에 따르면 특히 “업무혁신과 조직문화혁신”을 깊이 들여다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키워드만 있을 뿐 업무와 조직문화를 어떻게 바꾸겠다는 설명은 없었다.
한 가지 힌트는 있다. 지난해 11월 기업은행장 임기 만료가 임박했을 무렵, 관가(官街)에서는 내부출신이 기업은행장을 3번 연속 맡으면서 파벌문화가 생겼다는 얘기가 흘러나왔다. 실무는 뒷전이고 사내정치가 심해졌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20년 이상 기업은행에 몸담은 D씨는 “파벌 문제는 외부행장 시절에도 있었다”며 “대한민국 어느 조직이나 파벌이 있지 않냐”고 반문했다. 이 역시 낙하산 행장을 위한 핑계 만들기란 지적이다.
침묵하는 민주당·거세게 반발하는 노조

<사진설명: 2020년 1월 3일 기업은행 본점 로비에 낙하산 인사를 반대하는 현수막이 걸려있다.>
행시로 공직에 입문해 기재부 주요보직과 IMF 파견 부이사관, 대통령 경제보좌관실 선임행정관, 기획재정부 제1차관, OECD 대한민국 대표부 대사를 맡았던 인물이 있다. 허경욱 전 기재부 차관이다. 윤종원 기업은행장과 이력이 비슷하다. 그는 2014년 박근혜 정부 당시 기업은행장 물망에 올랐다가 야당이었던 민주당의 반발에 부딪혀 낙마했다. 당시 “관치는 독극물과 같다”며 낙하산 인사를 지적했던 민주당 의원들은 7년 뒤 현 사태에 침묵하고 있다.
기업은행 노조는 윤종원 행장을 낙하산 인사라고 규정하고 출근저지투쟁을 벌이는 등 극렬하게 저항하고 있다. 노조 측은 대통령 신년 기자회견 직후 성명서를 내고 “낙하산 반대는 공기업을 권력에 예속시키지 않고 금융을 정치에 편입시키지 말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2017년 대선 당시) 금융노조와 약속한 낙하산 인사 근절 약속을 저버리지 말아 달라”고 요청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100대 국정과제로 금융권을 비롯한 공공기관에 대한 낙하산 인사 근절을 약속한바 있다.
출구 없는 싸움 계속될까

<사진설명: 2020년 1월 3일 윤종원 신임 기업은행장이 첫 출근을 시도했다가 노조의 저항에 부딪혔다.>
윤종원 기업은행장은 13일째 본점에 발을 들이지 못하고 있다. 취임식 일정도 미정이다. 기업은행 노조는 앞으로 투쟁수위를 더 높이겠다는 입장이다. 김형선 기업은행 노조위원장은 15일 기자와의 통화에서 “투쟁 동력이 점점 강해지고 있는데 청와대와 정부당국이 현 상황을 오판하고 있다”며 “진정성 있는 사과와 재발방지 대책만을 요구해 왔는데, 이대로라면 문제를 끝까지 바로잡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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