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주의 시선]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 수난사

입력 2017-06-22 07:31  

[김은주의 시선]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 수난사

(서울=연합뉴스) "철인(哲人)은 말하되 다수 인민의 성(聲)은 곧 신의 성이라 하였나니 신은 스스로 요구가 없는지라. 인민의 소리에 응(應)하여 기(其) 요구를 발표하는 것이오, 신은 스스로 갈앙(渴仰)이 없는지라. 인민의 소리에 응하여 또한 기 갈앙을 나타내는 것이라. 다수 인민의 갈앙하고 차(且) 요구하는 소리는 곧 신의 갈앙하고 요구하는 소리니 이 곳 세계 개벽의 소리로다…인민의 소리는 이 개벽에 말미암아 더욱 커지고 넓어지고 철저하여지리라. 오호라 인류의 출생 수십 만 년의 오늘날, 처음으로 이 개벽 잡지가 나게 됨이 어찌 우연이라."

우리나라 최초의 종합잡지 개벽의 창간호에 실린 창간사 일부이다.

1920년 6월 26일 개벽 창간호(7월호)가 출간됐다. 항일운동과 신문화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천도교단이 설립한 개벽사에서 펴냈다.

창간 동인은 이돈화, 이두성, 민영순, 김기전, 박달성, 차상찬 등이었고, 최종정, 변군항 두 독지가가 거액을 기부했다. 창간호의 판권장을 보면, 편집인 이돈화, 발행인 이두성, 인쇄인 민영순, 인쇄소 신문관, 발행소 개벽사, 사장은 최종정이며 사무실은 서울 종로구 송현동 34번지 천도교 서울교구 안에 있었다. 월간으로 발행했으며 A5판(국판) 160여 면으로, 값은 1부당 40전이었다.

1919년 3·1 운동 이후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책을 내세워 조선인에게도 신문, 잡지의 발행을 허가했다. 그래서 나온 것이 1920년 3월에 조선일보, 4월에 동아일보, 6월에 개벽이었다.





개벽은 창간호부터 일제의 탄압을 받았다. 일제강점기 우리 잡지의 수난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창간호는 발간과 동시에 호랑이가 포효하는 그림이 그려진 표지와 일부 기사의 문구를 문제 삼아 당국이 전부 압수했다. 잡지 맨 앞에 이른바 '사고(謝告)'를 싣고 문제가 된 부분을 삭제하여 호외를 냈다. '사고'의 내용은 "…금싸락ㆍ옥가루와, '단군신화' 말단 2행과 그다음 막시마쓰의 격언과, 시저의 신하의 간청에 대한 답언과, 차상찬의 한시와, 소설 '유범(流帆)' 중의 '모두가 봄이다'의 다음 4행과, '소설개요' 말의 2행"이 검열에서 문제 되어 판매금지를 당했으므로 이를 삭제하여 호외로 발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조차 트집을 잡아 차압 처분을 내렸다. 그래서 '임시호'라는 이름을 붙여 창간호가 세상에 나오게 됐다.

이후 계속되는 압력과 심각한 경영난으로 결국 1926년 8월 1일 통권 제72호(8월호)를 끝으로 강제 폐간됐다. 8월호에서 문제가 된 글은 박춘우가 쓴 '모스크바에 새로 열린 국제농촌학원'으로, 개벽은 폐간까지 발행금지 34회, 발행정지 1회, 벌금 1회 등의 처분을 받았고, 논문 삭제는 95회나 있었다. 더구나 폐간호는 대부분이 압수되어 수레로 종로경찰서 뒷마당으로 싣고 가서 한 권씩 작두질해서 버렸다고 한다.

8년 후인 1934년 11월 발행인 겸 편집인 차상찬 명의로 개벽을 속간하여 4호까지 발행했으나 버티지 못하고 1935년 3월 1일 자진 폐간했다.

해방 후 1946년 1월 김기전을 발행인 겸 편집인으로 하여 개벽이 복간됐다. 1926년 폐간된 개벽의 호수를 이어 73호부터 시작했다. 복간호의 창간사를 보면 당시의 감회가 어떠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이제 조선이 해방됨과 함께 개벽이 다시 나온다. 개벽은 지난 1920년, 조선의 독립운동과 함께 창간되어, 무릇 일곱 해 동안을 싸워오다가 1925년 8월, 우리의 혁명가 여러분을 소개했다는 이유로 필경 저들의 손에 암살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긴말을 하고 싶지 않거니와 도합 칠십이 호를 내는 중에 발매 금지가 삼십사 회, 거기에 또 벌금, 또 정간, 오히려 부족하여 그들은 우리의 손에 수갑을 채워 종로 네거리를 걸리고 잔학하게도 개벽을 우리들의 손으로부터 빼았었었다…"

1925년 8월호에는 해외에서 활약하는 독립운동가들의 '인물론'을 특집으로 실었다. 이 특집이 문제가 되어 개벽은 3개월간 정간당했다.

개벽은 1949년 3월 25일(통권 제81호)까지 9호를 발행하고 사라졌다.






개벽은 천도교의 재정적 후원을 받기는 했으나 천도교의 기관지는 아니었다. 인내천 사상을 전하는 글을 매호 한 편 정도 실었을 뿐이다.

개벽은 창간호부터 다양한 현실 문제에 대해 적극적으로 발언했다. 사회운동, 노동운동, 농촌계몽운동 등을 정면으로 다루었으며 1923년부터는 사회주의 계열의 기사와 논설을 본격적으로 게재했다.

시사 문제를 기사나 논설로 직접 제시하는 것 외에도, 사회비평과 풍자를 통해 현실을 비판했다. 이는 기사나 논설보다 검열이 상대적으로 느슨했기 때문이다.

개벽은 문학에도 매호 지면의 3분의 1 이상을 할애했고, 역사, 지리, 종교, 학술 등도 때로는 특집을 낼 정도로 중시했다. 문예잡지 못지않게 신인을 발굴했고, 적극적으로 문학이론과 외국 문학을 소개했다.

개벽에는 많은 문학작품이 실렸다.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1921),' 현진건의 '빈처(1921)' 등의 소설과 김소월의 시들이 주목받았다. 김소월은 1922년 한 해 동안에만 '진달래꽃,' '금잔디,' '엄마야 누나야' 등 30여 편을 개벽에 발표했다. 김기진, 박영희 등이 새로운 계급주의적 경향문학 이론을 들고나와 활발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다.

1926년 6월호에는 민족시인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가 실렸다. 시는 바로 검열에 걸려 개벽은 다시 판매 금지당하고 압수됐다.

개벽사는 개벽 외에도 신여성, 별건곤, 어린이, 새벗, 신소년, 별나라, 학생 등의 잡지를 발행하며 1920년대 잡지계를 이끌었다.







당시 문맹률이 90%에 달하고 전체 신문과 잡지 구독자 수가 10만 명이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개벽은 매호 평균 8천 부 정도가 판매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개벽은 일제강점기 나온 잡지 중에서 가장 탄압을 많이 받았던 잡지로 꼽힌다. 민족의 의사를 충실히 대변했고, 일제에 맞서 민족의 자존을 꿋꿋하게 지켜나갔기 때문이다.

한국 최초의 잡지는 1896년 2월 1일 당시 도쿄에 있던 대조선일본유학생친목회에서 발행한 '친목회 회보'로 알려졌다. 그러나 본격적인 종합잡지는 개벽이 처음이다.

한국 잡지의 역사는 친목회 회보를 기점으로 하면 121년, 개벽을 기점으로 하면 97년이 된다. 그동안 한국의 잡지는 숱한 역경을 겪으면서도 국가발전에 기여해왔다. 한국잡지협회에 등록된 회원사는 5월 말 현재 506개사에 달한다. 디지털 시대를 맞아 잡지계는 수많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민족의 앞날이 암담했던 시기, 온갖 압박에도 굴하지 않고 민족의식을 고취해온 개벽의 정신을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글로벌코리아센터 고문)

kej@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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