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박열 재조명 붐과 일본 의인 후세 변호사

입력 2017-07-04 07:30  

[이희용의 글로벌시대] 박열 재조명 붐과 일본 의인 후세 변호사



(서울=연합뉴스) 이희용 기자 = "내가 일본의 황태자를 폭살의 대상으로 삼은 첫 번째 이유는 일본 국민이 신성시하는 황실의 정체가 사악한 귀신과 같은 존재임을 알리기 위함이다. 두 번째는 조선 민족에게 독립 열정을 자극하기 위해서고, 세 번째는 일본 사회운동가들에게 혁명적 기운을 불어넣기 위해서다."



1923년 9월 일본 히로히토 황태자(당시 건강이 악화한 다이쇼 천황을 대신해 섭정)를 암살하려 한 혐의로 체포돼 1926년 3월 사형선고를 받은 독립운동가 박열의 법정 최후진술이다. 지난주 개봉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이 흥행 가도를 달리고 있고 '박열, 불온한 조선인 혁명가' '열애-박열의 사랑' '운명의 승리자 박열' '나는 박열이다' '아나키스트 박열' '대역죄인 박열과 가네코' 등의 책이 지난달 앞다퉈 출간되는 등 영화가와 서점가에서 박열 재조명 바람이 불고 있다.


식민지 조선의 청년 박열은 서슬 퍼런 식민 종주국 일본에서 불령선인(不逞鮮人)을 자처하며 황실을 조롱하고 제국주의를 무너뜨리려 한 아나키스트 혁명가였다. 그의 곁에는 동지이자 아내인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가 있었다. 영화 '박열'은 옥중 생활과 법정 투쟁을 중심으로 70여 년 전 이들의 불꽃 같은 삶을 보여주며 오늘날 우리에게 인생과 조국의 의미를 묻는다.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쏠린 국내외의 이목을 돌리기 위해 일제가 박열에게 누명을 씌었다는 의혹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박열은 법정에서 조선시대 관복 차림으로 당당하게 일제의 죄상을 꾸짖고 천황제의 허구성을 폭로하며 일본 권력자들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가네코도 '배신자'란 일본인들의 비난에 굴하지 않은 채 '조선 독립 만세'를 외쳐 법정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세인의 관심을 끈 것은 박열을 향한 가네코의 동지적 사랑이었다. 박열이 쓴 시 '개새끼'에 감명받은 가네코는 그에게 '운동 활동에서는 나를 여성으로 보지 않고, 한쪽 사상이 타락해 권력자와 손잡는 일이 생기면 공동생활을 끝낸다'란 서약에 서명하게 한 뒤 동거에 들어갈 만큼 당차고 신념 굳은 혁명 여성이었다. 가네코가 책을 펴들고 박열 앞에 기대앉은 모습의 옥중 결혼사진은 일본 열도를 들끓게 했다. 천황의 특사로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뒤 가네코는 옥중에서 의문사해 박열의 고향 경북 문경에 묻혔고, 박열은 22년 2개월이란 일본 최장 수감 기록을 세우고 1945년 10월 출옥했다. 재일본조선인거류민단(현 재일본대한민국민단) 초대 단장을 맡기도 한 그는 1949년 5월 영구귀국했다가 6·25 때 납북돼 1974년 북한에서 별세했다.




영화에선 우리가 기억해야 할 또 한 명의 일본인이 등장한다. 박열 변론을 맡은 후세 다쓰지 변호사다. 스크린에는 식민지 청년에게 연민을 느끼는 선한 심성의 소유자처럼 비치지만 동정심이나 인권 의식을 뛰어넘어 조선의 독립을 옹호하고 군국주의 반대 투쟁을 펼친 강골이다. 두 차례 옥고를 치르고 세 차례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하면서도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반전운동을 벌이던 셋째아들이 교토형무소에서 옥사하자 "전쟁터에서 죽은 것보다 감옥에서 죽은 것이 장한 일"이라고 의연하게 말했다.


1880년 일본 미야기현에서 태어난 후세는 도쿄의 메이지법률학교를 졸업하고 사법시험에 합격해 검사시보로 임용됐으나 생활고에 시달리다 자녀와 동반자살하려 한 여성을 살인미수죄로 기소해야 하는 현실에 회의를 느껴 1903년 변호사가 됐다. 인권변호사로 이름을 알리던 그는 1911년 논문 '조선독립운동에 경의를 표함'을 발표해 일본 검찰의 밤샘 조사를 받았다. 1919년 2·8 독립선언에 가담한 조선 청년들을 위해 무료 변론에 나선 데 이어 1920년 "탄압받고 힘없는 사람들 편에 평생 서겠다"는 뜻을 담은 글 '자기 혁명의 고백'을 언론에 배포했다. 1923년 8월에는 경성(서울)을 처음 방문해 의열단원 김시현을 변호하고 백정들의 신분 철폐 모임인 형평사를 지원하는가 하면 재일조선인 유학생단체 북성회가 주최하는 순회강연에 나서기도 했다.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학살극이 일어나자 후세는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했으며 이듬해 독자적인 조사 보고서를 냈다. 박열과 가네코가 대역죄로 기소되자 "조선인 학살 범죄를 감추려고 조작한 것"이라며 무죄를 주장했다. 이들의 옥중 결혼도 돕고, 가네코 유골을 발굴해 화장한 뒤 집에 안치했다가 박열 형에게 전해주었다. 후세는 황궁 앞에 폭탄을 던진 김지섭도 변호하고 1925년 을축대홍수 때는 조선 수재민 구호 운동을 펼치기도 했다. 동양척식회사에 농토를 빼앗긴 전남 나주군 궁삼면 농민들이 혈서와 소송의뢰서를 들고 일본으로 찾아와 도움을 호소하자 두 번째로 조선을 찾아와 중재를 끌어냈다. 그때 궁삼면에는 "왔소! 왔소! 후세 씨 우릴 살리러 또 왔소!"라고 적힌 환영 벽보가 나붙을 정도로 그는 조선인의 신뢰와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후세는 김재봉·강달영 등이 조직을 재건하려다 붙잡힌 제2차 조선공산당 사건을 변론하기 위해 두 차례 조선을 더 방문했다. 광복 후에도 재일동포 차별 철폐 운동을 펼치고 1949년 4월에는 귀국하는 박열 일행에게 자신이 쓴 '조선건국 헌법초안 사고(私考)'를 선물로 건네며 대한민국의 발전을 기원했다. 1953년 9월 13일 타계한 뒤 세워진 그의 묘비에는 '살아서 민중과 함께, 죽음도 민중을 위해'란 생전의 좌우명이 새겨졌다. 2004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때까지 건국훈장을 받은 40여 명의 외국인 독립유공자 가운데 유일한 일본인이다.



영화 도입부에서 박열은 "난 일본 권력에 반감이 있지만 민중에겐 오히려 친밀감이 들지"라고 말한다. 실제로 가네코와 후세 말고도 조선인보다 더 한국인을 사랑하고 대한 독립을 열망한 일본인이 있었다. 영화 후반부 박열에게 사죄하는 소설가 나카니시 이노스케도 그중 하나다. 일제가 저지른 만행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되지만 양심적인 일본인도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역사의 정의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한일 우호와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heeyong@yna.co.kr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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